# 제20화: 벽에 부딪힐 때까지
옥상의 난간을 잡은 손가락이 하나둘 풀려나갔다. 민준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그것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아니, 떨림을 넘어 어떤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 같았다. 무엇인가가 잘못되었다는 신호. 자신이 더 이상 통제할 수 없는 무언가가 안에서 올라오고 있다는 신호.
“저는… 깨질까봐 두려웠어요.”
민준이 마지막 문장을 끝냈다. 옥상의 바람이 그의 말을 가져갔다. 강남의 빌딩 숲으로, 강남역 지하철 입구로, 어딘가 사라지는 곳으로. 민준은 자신의 말이 누구에게 닿는지 알 수 없었다. 아마도 아무도 듣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그의 어깨를 강하게 누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가볍던 손이 이제 무게를 실었다. 마치 자신이 사라지지 않도록 잡아두려는 듯이.
“깨지는 거 맞아. 배우는 깨져야 해.”
우리의 목소리가 변했다. 그 목소리는 더 이상 위로하는 톤이 아니었다. 오히려 정확하고, 차갑고, 선언적이었다.
“모든 좋은 배우는 자기 안의 뭔가를 깨뜨려야 한다고 생각해. 그 깨어진 부분에서 진짜가 나와. 아버지에 대한 미안함, 죄책감,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억누르고 있던 힘… 그게 다 깨져야 하는 거야. 그래야 사람들이 너를 볼 수 있어. 너의 진짜 모습을 .”
민준은 우리를 바라봤다. 그녀의 얼굴이 태양빛에 반쯤 가려져 있었다. 눈썹이 날카로워 보였다. 마치 누군가를 재단하는 심사관 같은 표정.
“쉽지 않을 거야. 깨지는 것은 아파. 하지만…”
우리가 잠깐 말을 멈췄다. 그녀의 시선이 강남역 방향으로 향했다.
“하지만 넌 이미 깨졌어. 10년 전에. 아버지가 떠날 때 넌 이미 깨졌고, 그 이후로 계속 깨진 채로 살아온 거야. 그래서 아무도 너를 본 적이 없는 거고.”
민준의 목이 움직였다. 침을 삼키려고 했지만 할 수 없었다. 마치 자신의 몸이 다시 얼어버린 것처럼.
준호가 민준의 반대쪽 팔을 잡았다. 그는 우리만큼 강하게 누르지 않았다. 대신 부드럽게, 지속적으로 누르고 있었다.
“너는 지금 무엇을 느끼니?”
준호의 질문은 단순했다. 하지만 그 단순함이 민준을 더욱 괴롭혔다. 왜냐하면 자신이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슬픔인가? 분노인가? 아니면 단순한 피로인가? 모든 감정이 한데 뒤섞여 있어서, 어디가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제가… 모르겠어요.”
민준이 대답했다.
“좋아. 모르는 게 맞아.”
준호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매우 차분했다. 마치 자신도 오랫동안 이 답답함을 느껴온 사람처럼.
“그리고 지금은 알 필요도 없어. 너는 지금 스튜디오에서 무언가를 드러냈어. 그것이 무엇인지는 나중에 알게 될 거야. PD가 너를 다시 부를 때쯤이면.”
PD가 자신을 다시 부를 것인가. 그 말이 민준의 귀에 들어왔을 때, 뭔가가 떨렸다. 희망일까? 아니면 더 큰 두려움일까? 민준은 알 수 없었다.
옥상에서 내려가려고 했을 때, 민준의 발이 멈췄다. 그 옥상의 난간을 한 번 더 보고 싶었다. 아버지를 만난 공간을 한 번 더. 비록 그것이 무대 위의 만남이었지만, 그것이 가장 진실했던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혼자 있고 싶어?”
우리가 물었다. 그녀는 민준의 뒤를 따라가지 않았다. 이미 준호가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우리도 그를 따라갔다.
“네. 잠깐만…”
민준이 대답했다.
옥상에 혼자 남겨진 민준은 난간으로 다시 걸어갔다. 손가락이 차가운 철제를 다시 잡았다. 이번에는 떨림이 없었다. 대신 어떤 결정이 내려지는 것 같은 무거움이 있었다.
강남의 빌딩들이 저물어가는 햇빛을 받으며 반짝였다. 그 중 하나가 넷플릭스 빌딩이었다. 그 안에 자신의 목소리가 남아있다. 아버지에게 한 말. “미안합니다.”
그 두 단어가 얼마나 깊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옥상의 난간에서 강남의 저녁을 바라보며, 민준은 뭔가가 변했다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변했다는 것을 느낄 수 없었지만, 자신의 주변 공기가 변했다는 것은 확실했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의 몸 주변의 공기를 모두 빨아내버린 것처럼.
더스타 엔터테인먼트의 라커룸. 그곳은 배우들이 자신의 짐을 두는 작은 공간이었다. 로커 몇 개, 거울, 그리고 벤치. 매우 초라한 공간이었다. 하지만 그곳은 배우들에게는 피난처였다. 회사의 눈과 카메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장소.
민준이 라커룸에 들어갔을 때, 성준이 거울 앞에 서 있었다. 자신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아니, 재검사하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자신의 턱 아래를 만졌다. 마치 어딘가 문제가 있는지 확인하려는 듯이.
“오늘 넷플릭스 오디션 봤지?”
성준이 거울에서 눈을 떼지 않고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밝았다. 하지만 그 밝음은 가짜였다. 민준은 그것을 알 수 있었다. 수개월을 같은 공간에서 지내며, 사람의 거짓 웃음을 구별하는 법을 배웠다.
“네.”
민준이 대답했다. 거울 옆의 로커를 열었다. 그 안에는 자신의 짐이 거의 없었다. 여분의 옷 한두 벌, 그리고 수건. 모두 가장 저렴한 것들이었다.
“어땠어? 떨어졌어?”
성준이 다시 물었다. 이번에는 거울에서 돌아서며 민준을 바라봤다. 그의 얼굴은 밝았지만, 눈은 어두웠다. 마치 두 개의 다른 얼굴을 하고 있는 것처럼.
“아직 결과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민준이 대답했다. 존댓말을 사용했다. 성준과의 관계에서는 항상 존댓말이 필요했다. 겉으로는 친하지만, 실제로는 경쟁자인 두 사람 사이에서.
“흠…”
성준이 중얼거렸다. 그의 손이 자신의 머리를 정리했다. 표백한 금발이 손가락 사이를 통과했다.
“나는 어제 CF 촬영했어. 유명한 화장품 브랜드. 좋은 기회지, 그치? 신인이 이 정도면 꽤 빠른 속도야.”
민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의 옷을 정리했다. 라커 안에 거는 것도 의미 있는 움직임이었다. 뭔가를 하고 있다는 의식의 표현.
“그런데 신기한 게…”
성준이 계속했다. 그는 계속 말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것이 자신의 우월성을 드러내는 방식이었다.
“민준이는 왜 이렇게 배역이 없는 거야? 4년을 다니면서 엑스트라만 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이번 넷플릭스가 첫 조연이라고?”
민준의 손이 잠깐 멈췄다. 그것은 매우 미세한 움직임이었지만, 성준의 눈에는 포착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성준은 항상 남을 관찰했기 때문이다. 약점을 찾아내려고.
“네.”
민준이 다시 대답했다. 한 음절. 그것이 이 대화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힘든 시간들이 있었겠네. 요즘 이 업계는 너무 경쟁이 심해. 한두 번 떨어지면 자신감이 바닥나기 쉽지.”
성준이 말했다. 그의 말투는 마치 위로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위로가 아니었다. 그것은 확인이었다. 자신이 더 나은 위치에 있다는 확인. 자신이 이미 성공의 길을 걷고 있다는 확인.
“저는 괜찮습니다.”
민준이 말했다.
“그럴 리가. 아무도 괜찮지 않아. 이 업계에서.”
성준이 거울로 돌아섰다. 다시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그의 손가락이 자신의 입술 아래를 만졌다. 마치 뭔가 빠진 것이 있는지 확인하려는 듯이.
“그런데 말이야…”
성준이 계속했다.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마치 자신도 이 말을 하고 싶지 않은 것처럼.
“내가 들은 바로는… 너 우리 회사 대표와 미팅 예정이라고?”
민준의 몸이 굳어버렸다. 그것은 자신도 알지 못하던 뉴스였다. 아니, 아니다. 준호가 그런 말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은 아직 예정일 뿐, 확정된 것이 아니었다.
“모르겠습니다.”
민준이 대답했다. 라커의 문을 닫았다. 그 문이 닫힐 때의 소리가 매우 컸다. 마치 자신이 이 대화를 강제로 종료하려는 의사 표현인 것처럼.
“하는 일이 있어서 먼저 가겠습니다.”
민준이 말했다. 그것은 거짓이었다. 할 일이 있는 게 아니라, 이 공간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성준의 눈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 눈이 자신을 관찰하는 방식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라커룸을 나왔을 때, 민준의 가슴이 다시 빨라졌다. 아까 옥상에서 멈춘 것 같던 떨림이 다시 시작되었다. 더스타 엔터테인먼트의 복도를 걸어가며, 민준은 자신의 심장 박동을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회사의 벽이 회색으로 변해갔다. 마치 자신의 심장 박동에 맞춰 색깔이 변하는 것처럼.
민준이 이수진 대표의 사무실 문을 두드렸을 때, 이미 준호가 그 안에 앉아있었다.
“들어와.”
이수진의 목소리가 문 너머로 들렸다. 그것은 명령이었다. 요청이 아니라.
문이 열렸다. 사무실의 공기는 차갑고 깨끗했다. 마치 병원이나 법정 같은 곳의 공기. 감정이 허락되지 않는 장소의 공기.
이수진은 창가에 등을 지고 앉아있었다. 태양이 그녀의 뒤를 비추고 있었다. 그 때문에 그녀의 얼굴이 역광에 가려져 있었다. 마치 그녀가 누구인지 알 수 없게 만드는 것처럼.
“민 배우. 앉아.”
이수진이 손으로 자신 맞은편의 의자를 가리켰다. 그 의자는 매우 낮았다. 마치 죄인이 법관을 앞에 두고 앉는 의자 같았다.
민준은 앉았다. 그의 눈이 자동으로 이수진을 향했다. 하지만 역광 때문에 그녀의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그것은 의도된 것이었다. 권력의 상징. 자신은 상대를 볼 수 있지만, 상대는 자신을 볼 수 없게 만드는 것.
“넷플릭스 오디션. 어땠나?”
이수진이 물었다. 그녀의 손이 탁자 위의 펜을 집었다. 마치 자신이 지금부터 무언가를 기록할 것이라는 신호.
“감사합니다. 좋은 기회였습니다.”
민준이 대답했다. 존댓말로, 조심스럽게.
“그게 답변이 아니야. 감정을 물었어. 어땠냐고.”
이수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하지만 그 낮음은 더 위협적이었다.
민준은 입을 열었다. 닫았다. 다시 열었다.
“저는… 제 아버지를 다시 만났어요.”
민준이 말했다.
그 말이 사무실에 떠다녔다. 마치 그 말이 자신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입에서 나온 것처럼.
이수진의 펜이 멈췄다.
“설명해.”
그녀가 말했다.
민준은 설명했다. 스튜디오에서 일어난 일. 침대 위의 배우. 아버지의 손. 그리고 자신의 침묵. 그 모든 것을 설명했다. 단어를 선택하지 않고, 그냥 흘러나오는 대로.
이수진은 말하지 않고 들었다. 그녀의 펜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기록하고 있었다.
“좋아.”
마지막으로, 이수진이 말했다.
“그것이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그 침묵. 그 감정. 그것을 유지해라. 그것이 너를 배우로 만드는 것이다.”
민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이수진을 바라봤다. 역광이 여전히 그녀의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나가기 전에 한 가지.”
이수진이 다시 말했다.
“성준이라는 배우를 알지?”
민준의 몸이 다시 굳어버렸다.
“네. 같은 기수입니다.”
“그 아이와 비교하지 마. 그 아이는 외형으로 올라온 배우야. 하지만 너는 감정으로 올라올 거야. 둘은 다른 길이야. 그리고 길이 다르면 도착점도 다르다.”
이수진의 말이 민준의 귀에 들어왔다. 그 말은 위로였을까? 아니면 경고였을까? 민준은 알 수 없었다.
“감사합니다.”
민준이 말했다.
“나가.”
이수진이 손으로 문을 가리켰다.
사무실을 나왔을 때, 준호가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땠어?”
준호가 물었다.
“모르겠어요.”
민준이 대답했다. 그것이 가장 정직한 대답이었다.
“좋아. 모르는 게 정상이야. 너는 지금 벽에 부딪혔어. 그 벽이 뭔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뭔가가 있어. 그리고 너는 그것을 뚫어야 해.”
준호가 민준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 손의 무게가 매우 컸다. 마치 자신의 인생 전체를 실은 손처럼.
“그리고 하나 더.”
준호가 계속했다.
“우리가 널 보고 있어. 혼자가 아니야.”
민준은 준호를 바라봤다. 그의 얼굴에는 피로가 가득했다. 마치 자신도 오랫동안 무언가와 싸우고 있는 사람처럼. 하지만 그 피로 속에는 뭔가 따뜻한 것이 있었다. 자신을 보고 있다는 확신.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확신.
“감사합니다.”
민준이 말했다.
그 밤, 민준은 자신의 오피스텔로 돌아갔다. 그곳은 매우 작은 공간이었다. 침대, 책상, 그리고 냉장고. 모두 자신의 급여가 반영된 가구들이었다. 저렴하고, 낡고, 하지만 자신의 것이었다.
민준은 침대에 누웠다. 천장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하얀 천장만 있었다. 마치 자신의 미래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공간.
하지만 그 공간 안에서, 민준은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아버지의 손. 아버지의 얼굴. 그리고 그 스튜디오에서 자신이 한 말. “미안합니다.”
그 말이 이제 자신의 몸 안에 살아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심어놓은 씨앗처럼. 그것이 자라날지, 죽을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히 뭔가가 변하고 있었다.
민준은 자신의 손을 들여다봤다.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 떨림이 두려움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변화의 신호였다. 자신이 점점 무너지고 있다는 신호가 아니라, 자신이 점점 깨어나고 있다는 신호였다.
옥상에서 우리가 한 말이 떠올랐다. “깨져야 한다.”
그렇다면, 자신은 계속 깨져야 한다. 벽에 부딪혀야 한다. 그 벽이 무너질 때까지.
밤이 깊어가면서, 민준의 눈이 천천히 감겨갔다. 그리고 꿈 속에서, 자신은 여전히 그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있었다. 그리고 침묵하고 있었다. 모든 말이 의미를 잃을 때까지, 침묵만 남을 때까지.
# 벽 너머의 침묵
## 1부: 사무실
이수진의 말이 민준의 귀에 들어왔다. 그 말은 위로였을까? 아니면 경고였을까? 민준은 알 수 없었다.
사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지금 이 순간, 민준의 몸은 마치 누군가의 손에 들린 종이처럼 얇아져 있었다. 한 점의 흔들림도 자신을 완전히 찢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수진의 목소리는 그런 상태에서 들려오는 모든 소리처럼 왜곡되어 들렸다. 마치 수중에서 누군가가 외치는 소리처럼. 선명하지만 동시에 매우 먼.
민준은 입을 열었다. 혀가 입안에서 무거웠다. 마치 납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감사합니다.”
그 말이 자신의 입에서 나온 것이 맞는지 확인하려고 했지만, 이미 그 말은 공기 중에 떠있었다. 되돌릴 수 없는 것들이 있다. 한번 내뱉은 말이 그런 것 중 하나다. 민준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조심했어야 했는데, 지금 그는 조심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이수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지 손을 들어올렸을 뿐이다. 그 손이 가리키는 방향은 문이었다. 회의실의 철제 문. 그 너머에는 복도가 있고, 복도의 끝에는 엘리베이터가 있고, 엘리베이터 너머에는 세상이 있다. 민준은 그 연쇄를 생각했다. 문 → 복도 → 엘리베이터 → 세상. 그리고 그 세상 속에서 자신은 어디에 있을 것인가?
“나가.”
이수진이 말했다. 그 목소리는 차갑지 않았다. 오히려 피로해 보였다. 마치 많은 사람들을 내보낸 경험이 있는 사람의 목소리처럼. 그리고 아마 그럴 것이다. 회장인 이수진은 수많은 사람들을 이 사무실로 불러들였고, 또 그들을 내보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희망과 절망을 목격했을까? 그 생각이 들자, 민준은 갑자기 이수진에게 연민을 느꼈다.
그 연민은 즉시 사라졌다. 감정은 변덕스러운 것이다.
민준은 일어났다. 의자가 뒤로 밀려났다. 그 소리는 금속이 금속을 긁는 음성으로, 매우 불쾌했다. 마치 자신의 신경을 직접 긁는 소리처럼. 민준은 그 소리를 듣고 있으면서도 움직임을 멈출 수 없었다. 자동으로 움직이는 신체. 자동으로 나가는 다리. 자동으로 문을 여는 손.
문이 닫혔다. 그 소리는 매우 조용했다.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하지만 민준은 그 소리를 명확히 들었다. 그것은 끝이라는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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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부: 복도의 만남
사무실을 나왔을 때, 민준은 복도의 벽에 몸을 기대고 싶었다. 하지만 기댈 수 없었다. 왜냐하면 준호가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준호는 민준이 나올 때까지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정확히 언제 나올지 알았는지, 그는 그곳에 서있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처럼. 민준을 보는 준호의 눈에는 호기심과 동정이 섞여있었다. 아니, 더 정확히는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눈빛이었다.
“어땠어?”
준호가 물었다. 그 질문은 매우 단순했다. 하지만 민준은 그것에 단순하게 대답할 수 없었다. 어땠다는 것을 설명하려면 얼마나 많은 말이 필요할까? 자신이 무엇을 느꼈는지, 무엇을 생각했는지, 무엇을 두려워했는지. 모든 것을 다 말할 수 없었다. 아니, 말하고 싶지 않았다.
“모르겠어요.”
민준이 대답했다. 그것이 가장 정직한 대답이었다. 어떤 아름다운 거짓도 없이, 어떤 자존심도 없이, 단지 진실만 있었다. 나는 모른다. 모르겠다. 알 수 없다.
그 말을 하면서 민준은 자신이 얼마나 약한지 깨달았다. 준호에게 자신의 약함을 드러냈다. 하지만 준호는 그것을 약함으로 보지 않은 것 같았다.
“좋아.”
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움직임은 매우 천천했다. 마치 깊은 물 속에서 움직이는 것처럼.
“모르는 게 정상이야. 너는 지금 벽에 부딪혔어. 그 벽이 뭔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뭔가가 있어. 그리고 너는 그것을 뚫어야 해.”
준호가 민준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 손의 무게가 매우 컸다. 마치 자신의 인생 전체를 실은 손처럼. 민준은 그 무게를 느꼈다. 단순한 물리적 무게가 아니라, 더 깊은 무언가의 무게. 경험의 무게. 고통의 무게. 그리고 그 무게를 견뎌낸 누군가의 무게.
복도의 형광등이 깜박였다. 그 깜박임은 불규칙했다. 마치 누군가의 심장 박동처럼 불규칙하고, 불안정하고, 생생했다. 민준은 그 깜박임을 보면서 자신도 그렇게 불규칙하게 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준호가 계속했다. 그의 목소리는 매우 조용했지만, 동시에 매우 명확했다.
“그리고 하나 더.”
그 말은 마치 기다려왔다는 듯이 나왔다. 마치 준호가 오래전부터 이 말을 해주기 위해 기다려왔다는 듯이.
“우리가 널 보고 있어. 혼자가 아니야.”
민준은 준호를 바라봤다. 처음으로 제대로 마주했다. 준호의 얼굴에는 피로가 가득했다. 눈 밑의 검은 자국. 이마의 주름. 입가의 경직된 선. 마치 자신도 오랫동안 무언가와 싸우고 있는 사람처럼. 그리고 아마 그럴 것이다. 준호는 누군가의 팀 리더였고, 누군가의 선배였고, 누군가의 보호자였다. 그 모든 역할을 하면서 얼마나 많은 무게를 짊어지고 있을까?
하지만 그 피로 속에는 뭔가 따뜻한 것이 있었다. 자신을 보고 있다는 확신.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확신. 그것이 준호의 얼굴에 새겨져 있었다. 피로 속에서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어떤 것. 인간으로서의 따뜻함. 동료로서의 책임감.
민준의 눈이 따뜻해졌다. 그것을 눈물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눈물은 더 큰 감정의 표현이고, 지금 민준이 느끼는 것은 그보다 더 작고, 더 깊고, 더 조용했다. 마치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속삭임처럼.
“감사합니다.”
민준이 말했다. 그 말은 단순했지만, 그 단순함 속에는 모든 것이 담겨있었다. 감사함. 미안함. 그리고 약간의 희망.
준호는 고개를 또 한 번 끄덕였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할 필요가 없었다. 모든 것이 이미 전해졌다.
복도의 형광등이 다시 깜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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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부: 귀가
그 밤, 민준은 자신의 오피스텔로 돌아갔다.
지하철 역에서 나오는 길, 민준은 자신이 이 동네에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 생각해보지 못했다. 1년? 2년? 더 오래? 시간이 흐르는 방식은 매우 이상하다. 때로는 하루가 일 년처럼 느껴지고, 때로는 일 년이 하루처럼 느껴진다. 민준은 자신의 삶이 후자였다고 생각했다. 언제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게, 계절이 바뀌고, 시간이 흘렀다.
오피스텔은 여전히 거기에 있었다. 회색 콘크리트 건물. 낡은 외벽. 깨진 창문들. 이곳은 도시의 하단부였다. 위층에는 고급 아파트들이 있고, 아래층에는 더 낡은 건물들이 있고, 그 중간에 이 오피스텔이 있었다. 전형적인 한 사람의 위치.
민준은 계단을 올라갔다. 엘리베이터는 고장난 지 오래였다. 그래서 항상 계단을 이용했다. 계단을 오르면서 민준은 자신의 발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는 매우 외로웠다. 이 시간에 계단을 오르는 사람은 자신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이미 자신의 방에 들어가있었을 것이다. 가족과 함께, 누군가와 함께, 아니면 혼자지만 무언가를 하면서.
현관에서 열쇠를 꺼냈을 때, 민준은 자신의 손이 떨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열쇠를 자물쇠에 끼우는 데 세 번을 시도해야 했다. 첫 번째는 빗나갔고, 두 번째는 방향이 잘못되었고, 세 번째에 겨우 들어갔다.
문이 열렸다. 그 안에는 자신의 세계가 있었다.
방은 매우 작았다. 침대, 책상, 그리고 냉장고. 모두 자신의 급여가 반영된 가구들이었다. 저렴하고, 낡고, 하지만 자신의 것이었다. 침대는 싱글 사이즈. 책상은 IKEA에서 산 조립식 책상. 냉장고는 미니 냉장고. 모든 것이 최소한이었다. 마치 자신의 인생처럼.
민준은 옷을 벗었다. 와이셔츠의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아침에 이 옷을 입으면서 느꼈던 감정을 다시 생각해보았다. 두려움. 기대. 불안. 그리고 지금 그 모든 감정은 사라졌다. 남은 것은 피로뿐이었다.
침대에 누웠다. 천장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하얀 천장만 있었다. 매우 평평하고, 매우 텅 빈, 완벽하게 아무것도 없는 천장. 마치 자신의 미래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공간. 가능성도 없고, 불가능성도 없고, 단지 공백만 있는 공간.
하지만 그 공간 안에서, 민준은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환각이 아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환각이 맞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매우 현실적인 환각이었다.
아버지의 손.
그것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스튜디오에서 자신의 손을 잡은 아버지의 손. 그 손의 온기. 그 손의 떨림. 그 손 안에 담긴 모든 감정들. 후회. 사랑. 그리고 용서. 아니, 용서를 구하는 마음.
아버지의 얼굴.
그것도 떠올랐다. 눈물을 흘리던 아버지의 얼굴. 민준은 지금까지 자신의 아버지가 우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다. 아버지는 항상 강한 사람이었다. 무언가를 감정적으로 표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날, 그 스튜디오에서, 아버지는 약했다. 인간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한 말.
“미안합니다.”
그 말이 이제 자신의 몸 안에 살아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심어놓은 씨앗처럼. 그것이 자라날지, 죽을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히 뭔가가 변하고 있었다. 자신의 몸 속 어딘가에서, 가장 깊은 곳에서.
민준은 자신의 손을 들여다봤다.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왜 떨릴까? 추워서? 아니다. 실내 온도는 충분했다. 두려워서?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 그 떨림이 순수한 두려움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변화의 신호였다.
자신이 점점 무너지고 있다는 신호가 아니라, 자신이 점점 깨어나고 있다는 신호였다. 무너지는 것과 깨어나는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 방향이다. 무너지는 것은 아래로 향하고, 깨어나는 것은 위로 향한다. 아니, 더 정확히는 깨어나는 것은 방향이 없다. 그냥 변화할 뿐이다. 그리고 그 변화는 고통스럽다.
민준은 침대에서 일어났다. 창문으로 걸어갔다. 밖은 밤이었다. 도시의 야경이 보였다. 수천 개의 창문. 수천 개의 불빛. 그리고 그 불빛 뒤에 있는 수천 개의 사람들. 그들도 모두 자신처럼 누워있을까? 천장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미래를 생각하면서?
옥상에서 준호와 한 말이 떠올랐다.
“깨져야 한다.”
그렇다. 자신은 깨져야 한다. 계속 깨져야 한다. 벽에 부딪혀야 한다. 그 벽이 무너질 때까지. 아니, 자신이 무너질 때까지. 아니, 자신이 변할 때까지.
민준은 다시 침대로 돌아갔다. 누웠다. 천장을 바라봤다. 이번에는 천장이 다르게 보였다. 마치 어딘가로 향하는 문처럼. 마치 다른 세계로 가는 입구처럼.
밤이 깊어가면서, 민준의 눈이 천천히 감겨갔다.
그리고 꿈 속에서, 자신은 여전히 그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었다. 아버지가 옆에 있었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있었다. 그리고 침묵하고 있었다.
침묵. 그것이 가장 깊은 대화였다. 모든 말이 의미를 잃을 때까지, 침묵만 남을 때까지. 그 침묵 속에서 민준은 무언가를 이해했다.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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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부: 새벽
새벽 3시. 민준은 눈을 떴다.
꿈이 현실이었는지, 현실이 꿈이었는지 구분할 수 없었다. 신체는 침대 위에 있지만, 의식은 어디론가 떨어져 나가있었다. 마치 자신이 두 개의 다른 차원에 동시에 존재하는 것처럼.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화면에는 시간이 표시되었다. 03:17. 그리고 여러 개의 메시지.
첫 번째는 어머니였다. “밥은 먹었니?”
두 번째는 준호였다. “내일 옥상에서 만나자.”
세 번째는 알 수 없는 번호였다. 하지만 내용을 보면 그것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아들, 나야. 내일 뵙자. 어디든 좋아.”
아버지였다.
민준은 화면을 끄지 않고 그것을 들고 있었다. 마치 그것이 생명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메시지들이 사라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