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75화: 거울 너머의 진실
준호의 손이 얼굴에서 내려왔다. 그의 눈은 민준을 똑바로 봤다. 편의점의 형광등이 그의 눈동자에 반사되어, 마치 두 개의 작은 불빛이 깜빡이는 것처럼 보였다. 밤 12시 23분. 시간은 계속 흘렀지만, 이 공간 안에서는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넌 왜 날 믿지 않는 거야?”
준호의 질문은 단순했지만, 그 안에는 수년의 무게가 들어 있었다. 민준은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진실은 복잡했기 때문이다. 민준은 준호를 믿고 싶었다. 하지만 동시에 두려웠다. 누군가를 완전히 믿는다는 것은, 그 사람이 자신을 완전히 배신할 수 있는 가능성을 동시에 받아들인다는 의미였다.
“형을 믿습니다,” 민준이 말했다.
“그럼 왜 눈빛이 그래?”
준호는 민준의 얼굴을 읽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민준의 표정이 자막처럼 보이는 것처럼. 민준은 자신의 얼굴을 통제할 수 없었다. 배우는 얼굴로 거짓말을 할 수 있어야 했지만, 민준은 그렇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는 준호 앞에서는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형이 뭘 하려고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그 말이 나오자, 준호의 표정이 변했다. 마치 누군가 그의 가슴을 파고드는 것처럼. 준호는 테이블 위의 식은 커피를 들었다. 그리고 한 모금을 마셨다. 입술이 일그러졌다. 커피의 맛이 아니라, 시간이 만든 맛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가 뭘 하려고 한다고 생각해?”
“모르겠습니다.”
“정말로?”
“네.”
준호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것은 비통한 웃음이었다. 편의점의 형광등 아래에서 울려 나온 그 웃음은, 마치 누군가 영혼을 빨아내는 소리처럼 들렸다. 편의점의 직원은 계산대 뒤에서 휴대폰 화면을 보고 있었다. 그는 두 명의 남자가 나누는 이 대화를 전혀 듣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너를 구하려고 했어. 알아? 그게 내가 하려던 거야.”
민준의 심장이 멈췄다.
“구한다는 게… 뭔가요?”
“세상이 너한테 하는 짓들로부터. 이 업계가 너한테 하는 짓들로부터. 그리고…” 준호가 말을 멈췄다. 그의 눈이 다시 창밖으로 향했다. 밤의 서울은 여전히 조용했다.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거리를 지나갔다. “그리고 너 자신으로부터.”
“내 자신으로부터?”
“넌 자신을 너무 많이 버려. 매번. 매 역할마다. 매 거울 앞에서. 넌 점점 투명해지고 있어.”
준호의 말이 민준의 가슴을 찔렀다. 정확했다. 너무 정확했다. 민준은 자신이 투명해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배우의 숙명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을 버려야 캐릭터가 들어온다고. 자신이 없어져야 다른 누군가가 될 수 있다고.
“그게 배우 아닌가요?”
민준의 질문에 준호가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른 종류의 웃음이었다. 슬픔과 이해가 섞인 웃음.
“아니야. 그게 배우가 아니야. 그게 소멸이야.”
편의점의 냉기가 민준의 피부를 스쳤다. 라면의 국물 향이 더 진해졌다. 누군가가 밥을 데우고 있는 소리가 들렸다. 마이크로웨이브의 비프음. 이 공간은 수천 명의 밤을 담고 있었다. 수천 명의 외로움을. 수천 명의 절망을.
“그럼 형은 뭘 원하는 거예요? 내게?”
준호가 민준의 눈을 마주쳤다. 그 눈 속에는 결정이 있었다. 오랫동안 숨겨두었던 무언가를 드러낼 준비가 되어 있었다.
“너를 보고 싶어. 진짜 너를. 거울 속의 너도, 대본 속의 너도 아닌. 밤 12시 편의점에서 떨고 있는 너. 그런 너를 보고 싶어.”
민준은 그 말을 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눈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감정이 아니라, 신체 반응이었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민준은 그것을 참았다. 배우의 기본이었다. 감정을 보여주지 않는 것.
“형이 본 내 모습이 뭐였어요?”
“죽어가는 모습이었어.”
말이 끝나자, 민준은 식은 커피를 들었다. 손이 떨렸다. 커피가 흔들렸다. 검은 액체가 컵 안에서 물결을 이루었다. 그는 그것을 마셨다. 입술이 차가워졌다.
“그럼 지금은?”
“지금도 죽어가고 있어. 하지만 조금 다르게. 전에는 아무도 너를 보지 않으면서 죽어가고 있었어. 지금은 누군가가 보고 있는데도 죽어가고 있어. 그게 더 나쁜 거야.”
민준은 준호의 말을 이해했다. 그리고 동시에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해한다는 것은,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너무 무거웠다.
“그럼… 내가 뭘 해야 하는 거예요?”
준호가 테이블 위의 냅킨을 들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커피를 닦았다. 그의 손가락이 냅킨 위에서 움직였다. 마치 악보를 그리는 것처럼. 마치 뭔가 중요한 것을 기록하려는 것처럼.
“살아야 해. 진짜로.”
“그게… 뭔가요?”
“모르지. 아무도 모르지. 하지만 적어도 거울 속에서 나가야 해. 거울 너머로.”
민준은 그 말을 들었다. 거울 너머. 그것이 무엇인지 그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지금 있는 곳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다. 지금의 자신은 거울 속에 갇혀 있었다. 메이크업 의자 위에서도, 세트 위에서도, 편의점의 테이블에서도. 항상 거울 속에서.
“거울 너머가 뭔데요?”
“모르지. 그래서 넌 가봐야 하는 거야.”
준호가 일어났다. 그의 움직임이 느렸다. 마치 수중에서 움직이는 것처럼. 밤의 피로가 그의 몸을 짓누르고 있었다. 나이가 보였다. 34세. 그것이 얼마나 오래된 나이인지, 이 업계에서는 얼마나 무거운 나이인지. 준호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형, 잠깐만요.”
민준이 준호의 팔을 잡았다. 그의 손가락이 준호의 팔 위에서 떨렸다. 준호는 그것을 느꼈다. 그리고 다시 앉았다.
“뭐?”
“형은 왜 내한테 이렇게…”
민준은 말을 마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 다음 말이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왜 준호는 자신에게 이렇게 집착하는가? 왜 자신을 구하려고 하는가? 왜 자신의 거울 속 모습을 보려고 하는가?
“왜냐하면 넌 그럴 가치가 있어.”
단순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 말 속에는 모든 것이 들어 있었다. 신뢰. 기대. 그리고 무언가 더 깊은 것. 민준은 그것을 느꼈다. 준호의 눈 속에서. 밤 12시의 편의점 형광등 아래에서.
“형도 거울 너머로 가봤어요?”
준호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음성 없는 웃음이었다. 입만 움직였다. 그의 어깨는 가라앉았다.
“나는 못 갔어. 나는 거울 속에서 계속 살고 있어. 그래서 넌 가야 해. 내가 못 한 것을 넌 해야 해.”
“그건… 너무 무거워요.”
“알지. 그래서 나도 이렇게 밤 12시에 편의점에 와서 너한테 이 말을 하는 거야.”
준호가 다시 일어났다. 이번에는 민준이 붙잡지 않았다. 준호는 편의점 문을 향해 걸어갔다. 자동문이 열렸다. 밤의 바람이 들어왔다. 그것은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은 온도였다. 그저 밤의 온도였다.
“형!”
민준이 일어나 준호를 따라갔다. 편의점 밖. 거리는 여전히 조용했다. 택시 한두 대. 그것뿐이었다. 준호는 거리 한 귀퉁이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거리의 가로등에 비추었다. 그림자와 빛이 그의 얼굴을 반으로 나누었다.
“집에 가. 제대로 자. 내일 세트에서 봐.”
“형은?”
“나는 여기 좀 더 있을 거야.”
“뭘 하려고요?”
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거리를 바라봤다. 밤의 서울을. 그 속에는 수백만의 사람들이 있었다. 수백만의 거울 속 인물들이. 수백만의 죽어가는 모습들이.
“형?”
“가. 제발.”
그 말 속에는 절박함이 있었다. 민준은 그것을 들었다. 그리고 준호를 더 이상 보지 않았다. 돌아섰다. 편의점 문을 지나갔다. 계산대의 직원은 여전히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민준은 그곳을 빠져나갔다.
거리로 나갔다. 밤 12시 35분. 택시를 잡았다. 운전사는 말을 하지 않았다. 목적지만 물었다. 민준은 주소를 말했다. 반지하 원룸. 그곳이 그의 집이었다. 택시가 움직였다. 창밖으로 서울의 야경이 지나갔다. 밝은 광고판들. 밤을 낮처럼 만드는 조명들. 그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 모두 거울 속이었다.
택시 안에서 민준의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 뜬 이름은 ‘우리’였다. 시간은 밤 12시 37분. 민준은 전화를 받았다. 하지만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들었다.
“민준이? 지금 어디야?”
우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마치 얇은 얼음 위를 걷는 것처럼. 민준은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민준이, 안 들려? 나 우리인데.”
“네. 들립니다.”
“지금 뭐 해?”
“택시 타고 가는 중입니다.”
“어디 가?”
“집.”
침묵이 내려앉았다. 전화 속의 침묵. 우리는 뭔가를 하려고 했다.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를 수 없었다.
“민준아, 내일 만날 수 있어?”
“뭐 하려고요?”
“그냥… 만나고 싶어. 근데 한 가지 물어봐도 돼?”
“네.”
“넌 왜 계속 죽어가는 것처럼 행동해?”
민준의 손이 떨렸다. 우리는 어떻게 알았을까? 누가 말했을까? 아니면 우리 자신이 봤을까?
“그런 게 아닙니다.”
“거짓 말지 말아. 나 넌 봐. 진짜로.”
준호와 같은 말이었다. 나는 본다. 나는 본다는 말.
“내일 어디서 만날까요?”
“같은 카페. 근데 이번엔 오후 3시. 그리고 혼자 와. 준호 형이나 누구한테도 말하지 말고.”
“왜요?”
“내가 뭔가 보여줄 게 있어.”
전화가 끝났다. 민준은 휴대폰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택시는 계속 움직였다. 밤의 서울을 가로질렀다. 창밖의 세상은 거울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거울 속에서, 자신의 윤곽이 점점 희미해지는 것을 느꼈다.
밤 12시 42분. 택시가 반지하 원룸 앞에 멈췄다. 민준은 돈을 냈다. 그리고 내렸다. 계단을 내려갔다. 반지하의 어둠 속으로. 문을 열었다. 천장의 작은 창을 통해 거리의 불빛이 들어왔다. 그것이 유일한 빛이었다.
민준은 침대에 누웠다. 천장을 봤다. 그 위로 사람들의 발걸음이 지나갔다. 밤 12시의 서울을 걸어가는 누군가의 발걸음. 그는 거기서 누워, 거울 너머의 세상을 생각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지금의 자신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했다.
밤 12시 48분. 그의 눈이 감겼다. 하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내일 오후 3시. 우리가 뭔가를 보여줄 것이라고 했다. 그것이 무엇일까? 그리고 그것이 자신을 거울 너머로 데려갈 것인가?
민준은 그 생각으로 밤을 새웠다. 천장 위의 발걸음 소리를 들으면서. 거리의 빛이 천천히 바뀌는 것을 보면서. 밤이 새벽으로, 새벽이 아침으로 변하는 것을 느끼면서.
그리고 그 과정에서 그는 한 가지를 깨달았다.
준호가 말했다. 거울 너머로 가야 한다고. 그리고 우리가 말했다. 자신이 뭔가를 보여줄 것이라고.
혹시, 그들이 자신을 거울 너머로 데려가려고 하는 건 아닐까?
그 생각이 그의 마음을 스쳤을 때, 반지하의 창밖으로 새벽이 들어왔다. 밤의 끝. 그리고 무언가의 시작.
제175화 끝 | 7권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