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트라이트: 제2막 – 제14화: 그 이름을 부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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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4화: 그 이름을 부르고 싶었다

옥상 문이 열렸을 때, 민준은 자신이 죽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누군가가 그의 팔을 잡았다. 힘이 센 손이었다. 팔뚝에 손가락이 파고들 정도로. 민준은 난간에서 몸을 돌렸고, 그제야 그 사람의 얼굴을 봤다. 준호였다. 얼굴이 창백했다. 눈가는 빨갛고 부어있었다. 마치 울었거나 오래 깨어있었던 것처럼. 아, 그렇다. 준호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민준이 어디 있는지. 어떤 상태인지.

“미쳤나.”

준호의 목소리가 떨렸다. 다시는 들을 수 없을 것 같은 목소리. 그것은 질책이 아니라 절망이었다.

민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자신의 팔이 준호의 손에 의해 당겨지고 있었다. 옥상의 가장자리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그 동안 민준의 머리는 공허했다. 마치 누군가가 모든 생각을 꺼내 간 것처럼.

“회사에 내려와. 우리가 기다리고 있어.”

그것이 준호가 한 유일한 말이었다. 다른 설명도 없었고, 다른 질문도 없었다. 그저 명령만 있었다. 아니, 명령이 아니라 간청이었다.

옥상 문을 통해 내려가는 길은 생각보다 길었다. 콘크리트 계단, 회사 로고가 붙은 벽, 그리고 각 층마다 반복되는 동일한 풍경. 4층, 3층, 2층. 민준은 그 길을 걸으면서도 현실감이 없었다. 마치 자신이 누군가 다른 사람의 몸을 조종하고 있는 것 같았다.

1층에 도착했을 때, 준호는 민준의 손을 놓지 않았다. 손가락이 여전히 팔뚝에 박혀있었다. 그것은 상처였다. 나중에 멍이 될 상처였다. 하지만 민준은 그것을 느끼지 못했다. 신체적 감각이 모두 차단된 것 같았다.

회사 로비를 지나갈 때, 몇몇 직원들이 그들을 봤다. 준호와 민준. 손을 잡고 있는 두 남자. 그들의 표정은 이상했다. 하지만 민준은 상관하지 않았다. 이미 상관할 것이 없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준호가 말했다.

“넷플릭스 오디션은 30분 뒤다. 너는 간다.”

“…예?”

민준이 처음으로 목소리를 냈다. 그것은 자신의 목소리가 아닌 것 같았다. 누군가 다른 사람의 목소리. 낮고, 텅 빈 목소리.

“넷플릭스 오디션. 30분 뒤. 넌 간다. 우리가 함께 준비해줄 거야. 그리고 넌 그 무대에 올라갈 거야. 이해했나?”

준호의 목소리는 명령조였다. 하지만 그 아래에는 무언가가 있었다. 극도의 불안감. 그리고 확신. 이상한 조합이었다.

“나는… 못할 것 같습니다.”

민준이 대답했다. 여전히 존댓말을 사용하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준호보다 훨씬 아래에 있다는 것을 확인하려는 것처럼.

“말하지 말아. 못한다는 말. 그 말은 지금 너 입에서 나올 수 없는 말이야.”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3층. 녹음실, 메이크업 룸, 그리고 연습실이 있는 층. 준호는 민준을 끌고 가장 안쪽 연습실로 향했다.

문이 열렸다.

우리가 그 안에 있었다. 하지만 민준이 라커룸에서 본 우리가 아니었다. 그녀는 완전히 달라 보였다. 얼굴에는 메이크업이 되어있었고, 머리는 예쁘게 스타일되어 있었다. 검은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 중요한 행사를 기다리는 여배우처럼. 하지만 그녀의 눈은 여전히 부어있었다. 그리고 그 눈이 민준을 봤을 때, 뭔가가 떨렸다.

“민준.”

그것이 우리의 첫 말이었다. 단순한 이름 호출. 하지만 그 안에는 너무 많은 것이 담겨있었다. 미안함, 걱정, 그리고 사랑. 아니, 민준은 사랑이라는 단어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다.

“여기 앉아.”

준호가 의자를 밀어냈다. 거울 앞의 의자. 민준은 앉았다. 자신이 왜 앉는지도 모른 채로.

우리가 민준의 뒤에 섰다. 거울을 통해 보면, 그녀는 민준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피하지 않고. 준호는 옆에 섰다.

“넷플릭스 오디션이 뭔지 알아?”

준호가 물었다.

“네. 알고 있습니다.”

“그 오디션은 배우를 보는 거 아니야. 그 오디션은 배우의 진실을 보는 거야. 배우가 얼마나 노출할 수 있는지. 자신을 얼마나 던질 수 있는지. 그것을 보는 거야.”

준호가 민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옥상에서처럼 강한 손이 아니라, 따뜻한 손이었다.

“넷플릭스는 완벽한 배우를 원하는 게 아니야. 넷플릭스는 진짜 인간을 원하는 거야. 완벽하게 거짓말할 수 있는 인간이 아니라, 자신의 상처를 드러낼 수 있는 인간을. 너는 그럴 수 있니?”

민준은 대답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것이 자신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깨달음의 제시였기 때문이었다.

“민준아.”

우리가 말했다. 반말이었다. 처음으로 우리는 민준에게 반말을 사용했다.

“넌 왜 자꾸 우리한테서 도망쳐?”

민준이 거울을 통해 우리를 봤다. 그녀의 눈이 정확하게 자신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상처를 입힐까봐요.”

“그런데 이미 상처를 입혔잖아. 넌 왜 못 깨달아? 넌 나한테 상처를 입혀서 나쁜 게 아니라, 그 상처를 나한테 보여주지 않아서 나쁜 거야. 나는 너의 상처를 보고 싶어. 너의 약함을 보고 싶어. 그래야 내가 너를 도와줄 수 있어.”

우리의 목소리가 떨렸다. 다시는 들을 수 없을 것 같은 목소리.

“넷플릭스 오디션에서 넌 뭐를 하면 돼? 완벽한 배우처럼 굴어? 아니지. 넌 그 캐릭터가 되는 거야. 그 캐릭터의 상처가 되는 거야. 그리고 그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 보여주는 거야.”

준호가 말했다.

“넷플릭스 오디션 원문을 다시 읽어 봤어?”

“네.”

“그 시나리오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이 뭐라고 생각해?”

민준이 생각했다. 지난 일주일 동안 수십 번 읽은 시나리오. 그 안에는 한 아버지와 한 아들의 이야기가 있었다. 아버지는 사업에 실패했고, 아들은 그 아버지를 돌봐야 했다. 그리고 어느 날, 아버지는 떠난다. 아니, 떠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부인한다. “넌 내 아들이 아니다”라고.

“아버지와 아들이 만나는 장면이요.”

“맞아. 그 장면에서 아들은 뭐라고 말할까?”

“모릅니다.”

“정확해. 넌 몰라. 왜냐하면 그 감정은 너한테 있기 때문이야. 시나리오에 쓰여있지 않은 감정. 그것을 너가 채워야 해.”

준호가 거울에서 물러섰다. 그리고 우리가 한 발 더 가까워졌다. 거울 안에서 보면, 우리의 얼굴이 민준의 얼굴 바로 위에 있었다.

“넌 너의 아버지를 생각해야 해.”

우리가 속삭였다.

“넌 너의 상처를 그 무대에 가져가야 해. 그리고 그걸 다 쏟아내야 해. 그것만이 배우가 사는 방법이야.”

민준의 눈에 물이 맺혔다. 하지만 그것은 눈물이 아니었다. 그저 눈물이 나기 직전의 상태. 마치 누군가가 자신의 내부를 누르고 있는 것처럼.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뭐가 있어?”

민준이 목이 메인 목소리로 물었다.

“넌 이미 다 했어.”

준호가 말했다.

“넌 우리한테 나타났어. 그것이 다야.”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오후 2시 45분에서 오후 3시까지는 15분밖에 없었다. 그 15분 동안 그들은 무엇을 했는가.

준호가 민준의 어깨와 목의 긴장을 풀어줬다. 손가락으로 누르면서. 마치 악기 조율하듯이. 우리가 민준의 앞에 서서 목소리 톤을 맞춰줬다. 그 시나리오의 첫 대사부터 마지막 대사까지. 반복해서.

그리고 민준은 그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준호의 낮고 묵직한 목소리. 우리의 높고 명확한 목소리. 그 두 목소리가 자신을 감싸고 있었다.

“넌 할 수 있어.”

우리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넌 할 수 있다고, 진짜로.”

그리고 민준은 일어났다.

연기 학원 건물 앞에서 민준은 혼자 섰다. 준호와 우리는 따라오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충분히 했다. 이제는 민준이 할 차례였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민준의 몸은 떨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것이 공포의 떨림이 아니었다. 그것은 다른 종류의 떨림이었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의 가슴 속에 불을 붙인 것처럼.

대기실에는 다른 배우들이 있었다. 민준과 비슷한 나이의 남자 배우들. 그들은 모두 같은 역할을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표정은 모두 같았다. 긴장, 불안, 그리고 희망.

민준의 이름이 불렸다.

“민준 배우.”

그가 일어섰다.

오디션 방에는 PD 한 명과 캐스팅 디렉터 한 명이 있었다. 둘 다 중년이었고, 둘 다 피곤해 보였다. 이것이 그들의 직업이었다. 하루 종일 신인 배우들을 보는 것. 그들의 희망을 심사하는 것.

“안녕하세요. 민준입니다.”

민준이 인사했다. 그것은 기계적인 인사였다.

“시작해도 될까요?”

PD가 물었다.

민준이 시작했다.

그는 시나리오를 읽었다. 아버지를 기다리는 아들의 역할. 아버지는 오지 않고, 아버지는 아들을 부인했다. 그리고 아들은 그 앞에서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야 했다.

처음 몇 줄은 기계적이었다. 마치 기계가 텍스트를 읽는 것처럼. 하지만 중간쯤에 뭔가가 바뀌었다.

민준의 목소리가 떨렸다. 하지만 그것은 약함의 떨림이 아니었다. 그것은 진실의 떨림이었다.

“왜죠?”

아들이 물었다. 그리고 민준이 그 질문에 답했다.

“왜 날 버렸어? 왜 나를 보고도 모른다고 했어?”

그 순간, 민준은 더 이상 시나리오를 읽는 배우가 아니었다. 그는 그 아들 자체가 되었다. 그리고 그 아들은 민준 자신이었다.

마지막 줄.

“날 봐줬으면 좋겠어. 아무것도 아닌 내가 누군가에게는 뭔가가 될 수 있다면… 날 봐줬으면 좋겠어.”

민준이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그 침묵은 방 전체를 채웠다.

PD와 캐스팅 디렉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눈이 바뀌었다. 처음과는 완전히 다른 눈으로 민준을 보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민준이 인사했다.

그리고 나갔다.

대기실로 나왔을 때, 민준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것은 신체적 반응이었다. 이번에는 자신이 느낄 수 있는 반응이었다.

핸드폰을 켰다. 화면에는 카톡이 들어와 있었다.

[준호: 어땠어?]

[우리: 민준이 화이팅!!!]

민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건물 밖으로 나갔다. 서울의 거리로. 저녁이 시작되는 시간. 가로등이 켜지고, 사람들이 퇴근하는 시간.

그리고 민준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누군가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옥상에서, 연습실에서, 그리고 지금도.

그들의 이름을 부르고 싶었다. 큰 목소리로.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대신 핸드폰 화면에 글자를 쳤다.

[민준: 감사합니다. 정말.]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었다. 이제는 기다릴 차례였다. 결과를 기다리는 것. 그리고 그 기다림 속에서, 자신이 누군가에 의해 기다려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

옥상의 난간이 더 이상 자신을 부르지 않았다.

대신 민준의 귀에는 우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넌 할 수 있어.”

그리고 준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넌 이미 다 했어.”

그 두 목소리가 섞여서, 민준을 감싸고 있었다.


END OF CHAPTER 14

# 14장: 오디션

## 제1부: 입장

대기실의 형광등은 너무 밝았다. 민준이 앉은 플라스틱 의자는 딱딱거리는 소리를 냈고, 그 소리는 방 전체에 울려 퍼졌다. 주변에는 자신과 비슷한 나이의 젊은 배우들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모두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긴장과 희망이 뒤섞인, 그 특유의 오디션 표정.

민준은 자신의 손을 봤다. 손가락 끝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혈관 위의 피부는 창백해 보였다. 요즘 그는 이런 신체적 신호들을 더 잘 알아채게 되었다. 과거에는 자신의 몸이 무엇을 느끼는지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그보다는 느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우리와 준호 때문에, 그는 자신의 신체와 다시 연결되어 있었다.

옆에 앉은 젊은 남자가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그는 계속 시나리오를 들었다 놨다를 반복했다. 마치 그 종이가 뜨거운 것처럼. 민준은 그의 불안감이 전염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공기 중에 떠다니는 불안감. 모두가 경쟁자이고, 모두가 원하는 같은 것. 하나뿐인 역할.

민준은 시나리오를 다시 읽었다. 손으로 더듬으며, 글자 하나하나를 입술로 움직여 본다. 말소리는 내지 않고, 오직 입술만 움직인다. 이것은 그가 어렸을 때부터 하던 습관이었다. 학교에서 책을 읽을 때, 밤중에 아버지가 들어오지 않을까 기다릴 때… 입술은 움직이고, 목구멍은 닫혀 있다.

“이번 역할은 정말 좋은 기회야.”

옆의 배우가 갑자기 말을 걸었다.

민준은 그를 바라봤다. 그의 눈은 간절했다. 간절함이 가득한 눈.

“응… 그래.”

민준이 대답했다. 하지만 그 대답은 자신의 목소리처럼 들리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 같았다. 배우의 목소리. 거짓의 목소리.

아니다. 이 상황에서 가장 진실한 것은 두려움이다.

민준의 가슴이 철렁했다. 심장이 자신의 갈비뼈를 두드리고 있었다. 콩콩콩. 규칙적이지만 강렬한 리듬. 어제는 잠을 잘 수 없었다. 우리와 준호가 자신을 격려해 줬을 때, 그는 미소지었다. 하지만 밤이 오자, 그 미소는 사라졌다. 그리고 내면의 목소리가 돌아왔다.

*너는 할 수 없어. 너는 절대로.*

그 목소리는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아니, 정확히는 아버지의 부재였다. 아버지가 자신을 보지 않는 눈.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 침묵.

“민준 배우님?”

누군가가 이름을 불렀다. 목소리는 중성적이고 차갑게 들렸다. 캐스팅 스태프였다.

“네?”

민준이 일어났다. 다리가 조금 떨렸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느껴야 했다. 그것을 느껴야만 진실할 수 있었다.

복도를 걸었다. 그의 발소리가 타일 바닥에 울렸다. 탁, 탁, 탁. 규칙적인 리듬. 이 리듬이 그를 앞으로 나아가게 했다. 심장의 리듬 대신, 발소리의 리듬.

“들어가세요.”

캐스팅 디렉터의 목소리. 그녀는 40대 중반의 여성이었다. 안경을 쓰고 있었고, 눈빛이 예리했다. 그런데 그 예리한 눈에는 어떤 따뜻함이 있었다. 마치 그녀도 언젠가는 이 자리에 앉아 있었던 것처럼.

PD는 더 나이가 많았다. 50대 초반. 그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마치 수천 개의 오디션을 봐온 것처럼.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민준이 인사했다. 목소리가 작게 나왔다. 하지만 그는 다시 인사했다. 이번에는 조금 더 크게.

“안녕하세요.”

이번에는 진실이 들렸다.

“시작해도 될까요?”

PD가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기계적이었다. 업무적인 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민준을 진정시켰다. 이것은 비즈니스다. 연기는 비즈니스다. 그리고 민준은 이미 이 게임을 이해하고 있었다.

“네. 좋습니다.”

## 제2부: 시작

민준이 시나리오를 펼쳤다. 종이가 손에서 소근거렸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억누르지 않았다. 떨림을 느꼈다. 그것이 진실하다고 했으니까.

“읽어보시겠어요?”

캐스팅 디렉터가 물었다.

“네.”

민준이 첫 번째 줄을 읽기 시작했다.

“아버지…”

그 한 단어가 나오는 순간, 무언가가 그의 목구멍을 조였다. 마치 누군가 손으로 그의 목을 누르고 있는 것처럼. 하지만 그는 계속했다.

“아버지, 왜 안 와?”

처음 몇 줄은 기계적이었다. 정말로. 마치 기계가 텍스트를 읽는 것처럼, 의미 없이, 감정 없이. 그는 단어의 발음에만 집중했다. 혀의 위치, 입술의 모양, 공기가 나가는 방식. 기술적인 것들. 배우의 도구들.

하지만 중간쯤에 뭔가가 바뀌었다.

“왜죠? 왜 날 버렸어?”

이 줄을 읽을 때, 민준은 자신이 더 이상 시나리오를 읽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그 아들이 되었다. 그리고 그 아들은 자신이었다.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하지만 그것은 약함의 떨림이 아니었다.

그것은 진실의 떨림이었다.

“왜 나를 보고도 모른다고 했어? 왜 내 말을 듣지 않았어?”

민준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아니, 통제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그는 연기하고 있지 않았다.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기억했다.

그 날의 일을. 아버지가 문을 박차고 나갔던 날. “넌 내 아들이 아니다”라고 말했던 그 날. 그리고 그 이후의 수백 개의 날들. 아버지를 기다리던 날들.

“날 봐줘. 제발.”

민준의 목소리는 더 이상 강하지 않았다. 그것은 부서졌다. 깨진 유리처럼. 하지만 그 깨진 소리 속에는 뭔가가 있었다. 뭔가 아름다운 것.

“아무것도 아닌 내가 누군가에게는 뭔가가 될 수 있다면… 날 봐줬으면 좋겠어. 제발.”

마지막 줄.

민준이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그 침묵은 방 전체를 채웠다.

## 제3부: 침묵

PD와 캐스팅 디렉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몇 초가 지났다. 아니, 몇 초 이상이 지났는지도 모른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느껴졌다.

민준은 그들의 얼굴을 봤다. 그들의 눈이 바뀌었다. 처음과는 완전히 다른 눈으로. PD의 얼굴에는 뭔가가 떠올랐다. 감정이었다. 그 무표정한 얼굴에 감정이.

캐스팅 디렉터는 안경 위로 눈물을 닦고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숨기려고 했지만, 민준은 봤다. 그녀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민준이 인사했다. 자신의 목소리가 이상하게 들렸다. 마치 다른 사람의 목소리처럼. 아니, 자신의 목소리가 맞다. 하지만 그것은 새로운 목소리였다. 전에는 없던 목소리.

그리고 나갔다.

오디션 룸을 나가며, 민준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면 그 감정들이 따라올까봐. 그 진실들이 따라올까봐.

대기실로 나왔을 때, 민준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것은 신체적 반응이었다. 이번에는 자신이 느낄 수 있는 반응이었다. 아드레날린이 가득한 손. 아직도 그 역할에 잠긴 손.

다른 배우들이 민준을 봤다. 그들의 눈에는 의문이 가득했다. 그들도 알고 있었다. 그 방에서 뭔가 다른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민준은 그들을 무시했다. 대신 핸드폰을 켰다.

화면에는 카톡이 들어와 있었다.

[준호: 어땠어?]

[우리: 민준이 화이팅!!!]

[우리: 화이팅!!!!]

[준호: 응 화이팅]

메시지는 몇 시간 전부터 들어와 있었다. 그들은 자신이 오디션에 들어갈 때쯤 보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민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건물 밖으로 나갔다.

## 제4부: 거리

서울의 거리로. 저녁이 시작되는 시간. 해가 지고 있었다. 하늘은 핑크와 오렌지로 물들어 있었다. 가로등이 켜지기 시작했다. 노란 불빛이 거리를 비추고 있었다.

사람들이 퇴근하고 있었다. 직장인들, 학생들, 아이들을 손잡은 엄마들. 모두가 어딘가로 가고 있었다. 모두가 누군가를 향해 가고 있었다.

민준은 거리를 걸었다. 특정한 목적지 없이. 단지 걸었다. 자신의 발이 가는 곳을 따라갔다.

그리고 그 순간, 민준은 깨달았다.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옥상에 있을 때는, 자신이 혼자라고 생각했다. 정말로.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거짓이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옥상에서, 연습실에서, 그리고 지금도. 스마트폰 화면을 통해서라도, 어디든지 있으면 그들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와 준호.

그들의 이름을 부르고 싶었다. 큰 목소리로. 거리의 중간에서 소리칠 수 없는 그 이름들을.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보고 있었다. 미친 사람처럼 보일까봐.

대신 핸드폰 화면에 글자를 쳤다.

[민준: 감사합니다. 정말.]

메시지를 보냈다. 그 메시지는 바로 전달되지 않았다. 마치 우주의 어딘가를 돌아서 전달되는 것처럼. 하지만 언젠가는 그들에게 도달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읽을 것이다.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었다.

이제는 기다릴 차례였다. 결과를 기다리는 것. 합격 전화를 기다리는 것.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 기다림 속에서, 자신이 누군가에 의해 기다려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했다.

옥상의 난간이 더 이상 자신을 부르지 않았다.

그 자리에는, 우리의 목소리가 있었다.

“넌 할 수 있어.”

그리고 준호의 목소리가 있었다.

“넌 이미 다 했어.”

그 두 목소리가 섞여서, 마치 온기처럼, 민준을 감싸고 있었다.

거리의 불빛과 함께.

저녁의 공기와 함께.

그리고 자신의 심장 박동과 함께.

민준은 걸었다.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

**14장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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