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14화: 서명 직전의 침묵
이수진의 사무실 책상 위에는 계약서가 다섯 장 놓여 있었다. 각 장마다 노란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고, 그 위에는 작은 글씨로 “서명 위치”라고 적혀 있었다. 민준은 그 글자들을 읽으면서, 자신이 어떤 의식의 입구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번 서명하면, 돌아올 수 없는 그런 입구. 이수진은 안경을 벗고 있었다. 보통 그녀는 항상 안경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 안경은 책상 옆에 놓여 있었다. 벗은 안경이 가진 의미는 명확했다. 이제부터는 더 이상 경영자가 아니라, 한 명의 인간으로서 대면한다는 뜻.
“앉아.”
이수진이 말했다. 손가락으로 자신의 맞은편 의자를 가리켰다. 민준은 앉았다. 계약서들이 자신을 정면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들은 마치 심판관들처럼 느껴졌다.
“당신은 지금 무서워?”
이수진이 갑자기 물었다. 그 질문은 예상 밖이었다. 민준은 준비된 답변들을 전부 잊어버렸다. 마치 컴퓨터가 갑자기 꺼진 것처럼.
“네.”
민준이 대답했다. 거짓을 할 에너지가 없었다.
“당신이 무서워하는 게 뭐야?”
이수진이 계속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호기심이 있었지만, 동시에 무언가 깊은 것이 있었다. 마치 자신도 같은 공포를 알고 있는 사람의 목소리.
민준은 그 질문에 대해 생각했다. 무엇이 자신을 무서워하게 하는가. 계약서? 아니다. 그것은 단지 종이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자신의 미래? 아니다. 미래는 이미 정해진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다면… 자신 자신인가. 자신이 서명한 이후에 자신이 무엇이 될지 모르는 것. 자신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것. 그것이 두려웠다.
“자신을 모르는 게 무서워요.”
민준이 천천히 말했다.
이수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것은 즐거운 웃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정의 웃음이었다. 마치 자신의 예상이 맞은 것을 확인한 그런 웃음.
“당신은 정직해. 그게 당신의 장점이야. 그리고 그게 당신의 문제야.”
이수진이 말했다. 그리고 계약서 중 첫 번째 장을 집어 들었다.
“이건 기본 계약서야. 당신이 더스타에 소속된 배우로서의 기본적인 권리와 의무를 담고 있어. 급여, 스케줄, 출연료 배분. 이런 것들.”
그녀가 설명했다. 하지만 민준은 그 말들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그의 귀에는 준호의 목소리가 겹쳐 있었다. “계약서에는 보수 비밀 유지 조항이 있을 거야.” 그 말이 반복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건.”
이수진이 두 번째 장을 집어 들었다.
“보수 비밀 유지 조항이야. 당신은 이 드라마의 모든 것을 외부에 공개할 수 없어. 캐스팅 과정, 촬영 일정, 출연료, 심지어 이 드라마가 넷플릭스와의 콜라보라는 것까지. 당신이 이것을 위반하면, 우리는 즉시 법적 조치를 취할 수 있어.”
민준의 가슴이 철렁했다. 그 말은 마치 누군가가 자신의 목에 칼을 대고 있다는 뜻이었다. 준호의 문자들이 떠올랐다. “당신은 이미 선택된 거야.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어.” 그렇다. 민준은 이미 거절할 수 없었다. 그는 이미 선택되었기 때문이다.
“이건 당신을 보호하기 위한 거야. 당신의 프라이버시를 지키기 위해서.”
이수진이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은 거짓처럼 들렸다. 아니, 거짓이 아니라 반쪽짜리 진실이었다. 그것이 당신을 보호하는 동시에, 당신을 감금한다는 것을 이수진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건.”
이수진이 세 번째 장을 들었다.
“조건부 독점 계약이야. 이 드라마 촬영 기간 동안, 당신은 우리의 승인 없이 다른 출연이나 공개 활동을 할 수 없어. 이것은 당신의 모든 시간과 이미지를 우리에게 전속시킨다는 뜻이야.”
민준은 그 말을 들으면서, 자신의 몸이 점점 작아지는 것을 느꼈다. 마치 자신이 한 손가락 크기로 축소되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그 축소된 자신이, 이수진의 손 위에 올려져 있다고 상상했다. 그 손가락 위에서, 자신은 완벽하게 통제되었다.
“당신이 이 조항을 거절하면, 당신은 주인공으로서의 모든 기회를 잃어. 우리는 다른 배우를 찾을 수 있거든.”
이수진이 말했다. 그리고 민준은 그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더스타는 언제든 자신을 대체할 수 있었다. 자신은 이미 충분히 소모 가능한 자원이었다.
“이건 위약금 조항이야.”
이수진이 네 번째 장을 들었다.
“만약 당신이 이 계약을 위반하면, 당신은 5억 원의 위약금을 내야 해. 이것은 당신이 감당할 수 있는 액수가 아니야. 당신이 일생동안 벌 수 있는 액수와도 비교가 안 돼.”
민준의 호흡이 얕아졌다. 5억 원. 그것은 숫자를 넘어서는 무엇이었다. 그것은 자신의 미래 전체였다. 그것은 자신의 선택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마지막 장.”
이수진이 다섯 번째 장을 들었다.
“이건 우리의 권리 조항이야. 우리는 당신의 이미지를 광고, SNS, 보도 자료, 심지어 뮤지컬 시나리오에까지 사용할 수 있어. 당신은 이것을 거절할 수 없어.”
민준은 그 말을 들으면서, 자신이 완전히 소비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의 얼굴. 자신의 목소리. 자신의 이름. 자신의 존재 전체가, 더스타의 자산이 되는 것이었다.
“당신이 이 계약을 서명하면, 당신은 공식적으로 우리의 소유가 돼.”
이수진이 말했다. 그 말은 극도로 명백했다. 소유. 그것이 이 모든 계약의 핵심이었다.
민준은 입을 다물었다. 대답할 말이 없었다. 혹은 대답해야 할 말이 너무 많아서,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랐다.
“당신은 준호를 신뢰해?”
이수진이 갑자기 물었다.
민준의 머리가 들려올랐다.
“네?”
“준호. 당신의 매니저. 당신은 그를 신뢰해?”
이수진이 다시 물었다. 그리고 그 질문 속에는 뭔가 깊은 함정이 있었다. 민준은 그것을 느꼈다.
“… 네.”
민준이 천천히 대답했다.
“좋아. 그럼 당신이 알아야 할 게 하나 있어.”
이수진이 일어섰다. 그리고 창문 쪽으로 걸어갔다. 강남의 야경이 그녀를 비추고 있었다. 그녀는 그 불빛 속에서 거의 투명해 보였다. 마치 유령처럼.
“준호는 지난주에 나한테 돈을 빌렸어. 2억 원. 당신의 캐스팅을 확정시키기 위해서.”
이수진이 말했다.
민준의 세상이 멈췄다. 말 그대로. 마치 시간 자체가 정지한 것처럼.
“뭐… 뭐라고요?”
민준이 겨우 말했다.
“준호가 우리에게 돈을 빌렸어. 그리고 그 돈의 대가로, 당신이 이 드라마의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했어. 당신이 PD 박미라와의 미팅에서 주인공으로 캐스팅될 수 있도록.”
이수진이 계속했다. 그리고 돌아섰다. 그녀의 얼굴은 다시 그림자 속에 있었다.
“그리고 그 2억 원은, 당신의 첫 출연료에서 공제될 거야. 당신이 모르는 사이에.”
민준은 그 말을 들으면서, 자신의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준호가… 자신을 위해 돈을 빌렸다고? 그리고 그 돈이 자신의 첫 출연료에서 공제될 것이라고?
“왜… 왜 이 말을 지금 하세요?”
민준이 물었다.
“왜냐하면 당신이 서명하기 전에, 당신이 알아야 할 것이 있기 때문이야.”
이수진이 책상 앞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앉았다.
“당신의 주인공은 자신의 의지로 이루어진 게 아니야. 당신의 주인공은 누군가의 빚으로 이루어진 거야. 그리고 그 빚은 이제 당신의 빚이 돼. 당신은 그것을 이해하고 있어?”
민준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의 목에서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오직 그의 심장만이 뛰고 있었다. 극도로 빠르게. 마치 자신의 가슴팍을 뚫고 나가려고 하는 것처럼.
“당신이 이 계약을 서명한다는 것은, 당신이 준호의 빚을 갚는다는 뜻이야. 그리고 당신이 이 계약을 서명하지 않는다는 것은, 준호가 우리에게 2억 원을 갚아야 한다는 뜻이야.”
이수진이 말했다. 그리고 계약서를 민준 앞으로 밀었다.
“당신이 무엇을 선택하든, 당신은 이미 감옥에 갇혀 있어.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어떤 감옥에서 죽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뿐이야.”
민준은 그 말을 들으면서, 자신의 모든 호흡이 멈춘 것을 느꼈다. 그는 마치 물 속에 가라앉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위로 올라가려고 해도, 누군가의 손이 자신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손은 너무나 강해서, 자신은 그것을 끊을 수 없었다.
“이수진 대표님…”
민준이 극도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지금 제게 하는 말은… 이것은 협박입니다.”
침묵이 흘렀다. 긴 침묵. 그 침묵 속에서 이수진은 민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선은 극도로 선명했다. 마치 자신의 영혼까지 꿰뚫어보는 그런 시선.
“맞아.”
이수진이 말했다.
“이것은 협박이야. 그리고 이것이 이 업계야. 당신이 배우가 되겠다고 선택한 그 순간부터, 당신은 이런 협박들 속에서 살아가야 해. 당신이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이것이 현실이야.”
민준은 그 말을 들으면서, 자신의 마지막 희망까지도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이 업계에 들어왔을 때, 자신은 어떤 환상을 가지고 있었는가. 자신의 연기가 누군가에게 닿을 것이라는 환상. 자신이 누군가의 삶을 바꿀 수 있다는 환상. 하지만 그 모든 환상은 거짓이었다. 그것들은 단지 미끼일 뿐이었다. 자신을 덫 속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미끼.
“서명해.”
이수진이 볼펜을 민준에게 밀었다.
민준은 그 볼펜을 봤다. 검은 볼펜. 극도로 평범한 볼펜. 하지만 그 볼펜이 가진 무게는 극도로 무거웠다. 마치 자신의 전체 삶을 누르고 있는 것처럼.
민준의 손이 떨렸다. 극도로 미세하게. 하지만 그 떨림은 자신의 내부에서는 마치 지진처럼 느껴졌다.
“만약에… 제가 서명하지 않는다면?”
민준이 물었다.
“그럼 당신은 다시 엑스트라가 돼. 그리고 준호는 우리에게 2억 원을 갚아야 해. 당신의 선택이야.”
이수진이 말했다.
민준은 계약서를 봤다. 다섯 장. 그 위에 붙은 노란 포스트잇들. 그리고 그 포스트잇들 위의 글자들. “서명 위치.” 그것이 자신의 미래를 결정할 다섯 개의 점이었다.
민준은 볼펜을 집어 들었다. 그의 손가락은 극도로 차가웠다. 마치 자신의 혈액이 모두 흘러나간 것처럼.
그리고 자신이 첫 번째 포스트잇 위에 펜을 대려는 순간, 민준은 자신의 이름을 썼다. 민준. 그 글자는 극도로 불안정했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의 팔을 잡고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나머지 네 개의 포스트잇들도 같은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민준. 민준. 민준. 민준. 다섯 번의 서명. 다섯 번의 죽음. 혹은 다섯 번의 탄생. 민준은 그것이 어느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마지막 서명을 마쳤을 때, 이수진은 계약서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의 금고로 넣었다. 마치 그것이 자신의 가장 귀중한 자산인 것처럼.
“축하해. 당신은 이제 공식적으로 우리의 배우야.”
이수진이 말했다.
“그리고 당신이 기억해야 할 것은, 당신이 이 계약을 위반하면 당신은 5억 원의 위약금을 내야 한다는 것이고, 당신이 이 계약을 지킨다면, 당신은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것이야.”
민준은 그 말을 들으면서, 자신이 이제 진정으로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은 마리오네트였다. 그리고 그 줄들은 이수진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이수진이 사무실의 불을 껐다. 이제 그곳은 완전히 어두워졌다. 강남의 야경만이 그들을 비추고 있었다. 그 불빛 속에서, 민준은 자신의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마치 자신이 이미 사라진 것처럼.
“나가도 돼.”
이수진이 말했다.
민준은 일어섰다. 그의 다리는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그는 사무실을 나갔다. 복도는 여전히 조용했다.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도, 누군가의 목소리도 없었다. 오직 자신의 호흡만이 있을 뿐이었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며, 민준은 자신의 휴대폰을 봤다. 준호로부터의 카톡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극도로 의미심장했다. 준호가 자신에게 연락하지 않은 것. 그것은 준호가 이미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수진이 자신에게 무엇을 말할 것인지를, 준호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끔찍한 부분이었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문이 열렸을 때, 민준은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1층 버튼을 눌렀다. 마치 자신이 이미 로봇인 것처럼.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누군가의 명령에 따라. 그 명령은 처음에는 준호에게서 온 것이었고, 이제는 이수진에게서 오고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 계속 누군가에게서 올 것이었다.
엘리베이터가 내려가고 있었다. 20층에서 19층으로. 18층으로. 민준은 그 숫자들을 세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남은 시간을 세는 것처럼.
그리고 자신이 1층에 도착했을 때, 민준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자신은 이미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은 단지 그 역할을 수행하는 도구였다. 주인공이라는 역할을 수행하는 도구. 그리고 그 도구는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점점 투명해지고 있었다. 점점 죽어가고 있었다.
로비의 유리문을 나갔을 때, 민준은 강남의 밤을 마주했다. 네온사인들. 차들의 불빛들. 빌딩들의 조명들. 모든 것이 자신을 비추고 있었지만, 자신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마치 유령처럼. 혹은 그보다도 더 투명한 무언가처럼.
민준은 자신의 휴대폰을 들었다. 준호에게 전화를 걸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왜냐하면 자신이 지금 준호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자신은 이미 준호의 돈에 묶여 있었다. 자신은 이미 이수진의 계약에 묶여 있었다. 자신은 이제 누구의 것도 아니었다. 오직 더스타의 것일 뿐이었다.
그 깨달음이 자신을 완전히 짓누르고 있었다.
밤 11시 47분. 민준은 여전히 강남의 거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 거리는 극도로 밝았지만, 자신은 극도로 어두웠다. 그것이 이 도시의 모순이었다. 이 도시가 밝을수록, 자신은 더 어둡다. 이 도시가 빛나갈수록, 자신은 더 사라진다.
그리고 자신은 그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이제야 비로소. 너무 늦은 후에 말이다.
[다음화로 계속…]
# 그 줄들
그 줄들은 이수진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마리오네트의 줄처럼. 아니, 더 정확히는 목줄처럼. 민준은 그 생각을 하는 순간 목이 졸리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실제로 목에 뭔가가 감겨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느낌은 매우 실제적이었다. 자신의 폐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 같았고,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고 있었다. 손가락 끝까지 차가운 혈액이 흐르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수진의 손가락이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카닥, 카닥. 마치 시계 초침이 똑딱거리는 소리처럼. 민준은 그 소리에 맞춰 자신의 심장이 뛰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의 맥박조차도 이미 이수진의 통제 아래에 있는 건 아닐까. 그런 황당한 생각이 자신의 뇌를 스쳐 지나갔다.
“이것들을 보시겠어요?”
이수진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마치 음악을 듣는 것처럼 부드러웠다. 하지만 그 부드러움 아래에는 칼날처럼 날카로운 뭔가가 숨어 있었다. 민준은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피부가 소름 돋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목덜미부터 시작된 소름이 척추를 따라 내려오고 있었다.
“네, 보여주세요.”
민준의 목소리는 자신의 목소리가 아닌 것처럼 들렸다.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이 자신의 입을 빌려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도 매우 능숙하게. 자신이 어떻게 말해야 할지를 정확히 아는 누군가가.
이수진이 문서들을 민준 쪽으로 밀어냈다. 종이의 표면이 책상 위를 미끄러지며 나는 소리가 있었다. 종이와 나무의 마찰음. 그것은 마치 고양이의 발톱으로 무언가를 긁는 소리와 비슷했다. 날카롭고, 불안하게 만드는 소리.
민준이 그 문서들을 들었다. 손이 떨렸다. 자신이 손을 떨지 않으려고 해도, 손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떨리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신체가 자신의 뇌보다 먼저 공포를 감지한 것처럼. 신체가 뇌에게 경고하고 있었다: ‘위험하다. 위험하다. 지금 당신은 위험하다.’
문서의 첫 번째 페이지를 읽으면서, 민준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한 줄, 한 줄. 글자들이 자신의 망막에 박혀들었다. 그리고 그 글자들이 뇌로 전달되었을 때, 민준은 완전히 얼어버렸다. 마치 자신이 얼음상이 된 것처럼. 호흡도 멈췄다. 심장도 멈췄다. 세상도 멈췄다.
“이게… 이게 뭐예요?”
민준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번에는 자신도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목이 조여오는 감각. 자신의 성대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감각.
“그건 당신이 해야 할 일들의 목록입니다.”
이수진이 말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 있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따뜻하지 않았다. 마치 얼음 조각이 웃음을 짓고 있는 것처럼. 차갑고, 신경을 곤두세우게 만드는 미소.
“당신은 준호의 돈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더스타는 당신을 배우로 데뷔시켜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당신은 그에 대한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이것들이 바로 그 대가입니다.”
민준이 다시 문서를 들여다봤다. 그 글자들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자신의 뇌는 마치 우유 속에 떠 있는 것처럼 무겁고 둔해 보였다.
“이것들을 해야 하는 거… 거야요?”
“네. 그래야 합니다.”
이수진이 확실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 확실함이 민준을 더욱 절망하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이것은 협상의 여지가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단순한 제안이 아니라, 명령이었다. 그리고 명령은 거부할 수 없는 것이었다. 특히 자신이 이미 그들의 손에 완전히 붙잡혀 있을 때는 더욱 그렇게.
“그리고 만약에… 만약에 이걸 안 하면?”
민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마치 지뢰밭을 걷고 있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각 단어를 신중하게 선택하면서.
이수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것은 웃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얼음이 깨지는 소리와 같았다. 차갑고, 위험하고, 돌이킬 수 없는 소리.
“그럼 당신은 이 계약을 위반하는 거고, 그에 따른 위약금을 지불해야 합니다. 준호가 당신에게 빌려준 돈의 500배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연예인 경력은 끝납니다. 한국에서의 당신의 미래는 끝나는 거예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민준은 완전히 부서져버렸다. 자신의 내부가 산산조각 났다. 마치 유리잔이 바닥에 떨어진 것처럼.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그리고 그 파편들이 자신의 가슴을 칼처럼 찔렀다.
“그래서 당신은 이걸 해야 합니다. 이것은 당신의 선택이 아닙니다. 이것은 당신의 운명입니다.”
이수진의 목소리가 더욱 낮아졌다. 마치 속삭이는 것처럼. 하지만 그 속삭임은 거대한 폭발음보다 더 크게 들렸다.
사무실의 불이 꺼졌다. 이수진이 벽의 스위치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순간, 세상은 검은색으로 변했다. 마치 민준의 앞날처럼. 검은색으로 변한 세상 속에서, 오직 강남의 야경만이 그들을 비추고 있었다.
네온사인의 불빛이 민준의 얼굴을 비췄다. 붉은색, 파란색, 초록색. 그 불빛들이 교차하면서 민준의 얼굴에 그려졌다. 마치 그 불빛들이 민준의 영혼을 칠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그 과정에서 민준의 원래 모습은 점점 사라져 가고 있었다.
“나가도 돼.”
이수진이 말했다. 마치 종을 울리는 것처럼. 마치 시간이 끝났다는 신호를 보내는 것처럼.
민준이 일어섰다. 그의 다리는 떨리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의 무릎 아래 얇은 줄을 감아 놓고 당기고 있는 것처럼. 그 떨림은 자신이 멈추려고 해도 멈출 수 없었다. 자신의 신체가 공포에 반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민준은 사무실 문을 향해 걸어갔다. 매 걸음마다, 발바닥에서 ‘딱’ 하는 소리가 났다. 마치 시계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처럼. 자신의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는 증거처럼. 그리고 그 흘러가는 시간이 자신을 어디로 데려갈지, 민준은 이미 알고 있었다.
복도는 극도로 조용했다. 밤 11시가 넘은 시간이었으니까. 건물의 대부분의 직원들은 이미 떠났을 것이었다. 하지만 민준은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누군가의 시선이 자신을 따라오고 있었다. 그것이 이수진의 시선인지, 아니면 더스타가 자신을 감시하기 위해 설치해 놓은 카메라의 시선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분명히 누군가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면서, 민준은 자신의 휴대폰을 들었다. 화면을 켰다. 준호로부터의 카톡은 없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마치 준호가 자신을 완전히 포기한 것처럼.
하지만 그것이 더 무섭게 느껴졌다. 왜냐하면 준호의 침묵은 더 큰 말씀과 같았기 때문이었다. 준호가 자신에게 연락하지 않은 것은 이미 자신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수진이 자신에게 무엇을 말할 것인지를, 준호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에게 미리 경고하지 않은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깨달음이 민준을 더욱 짓누르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손이 자신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그 손은 점점 더 세게 압박해오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끔찍한 부분은, 자신이 그 손을 밀어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문이 천천히 열렸다. 마치 입이 벌어지는 것처럼. 어둠의 입이. 그 어둠 속으로 민준이 들어갔다.
1층 버튼을 눌렀다. 손가락이 버튼을 누르는 순간, 민준은 자신이 더 이상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의 몸은 여전히 자신의 것이었지만, 자신의 의지는 이미 누군가의 손에 넘어가 있었다. 그 누군가는 처음에는 준호였고, 이제는 이수진이었고, 앞으로는 또 누군가일 것이었다.
엘리베이터가 내려가고 있었다. 20층에서 19층으로. 그 숫자들을 보면서, 민준은 자신이 매 층마다 조금씩 더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18층, 17층, 16층. 자신의 정체성이 벗겨져 나가고 있었다. 마치 양파의 껍질을 벗기는 것처럼. 그리고 양파의 중심에는 아무것도 없다.
15층에서, 민준은 자신의 손을 봤다. 그 손은 자신의 손이 맞는 것 같았다. 같은 피부색. 같은 손가락. 하지만 무언가가 달랐다. 그 손이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의 손을 자신에게 이식한 것처럼. 그리고 그 손은 이제 자신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 대신, 누군가의 명령을 따르고 있다.
10층. 5층. 2층. 1층.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문이 열렸다. 그리고 민준은 로비로 나왔다.
로비의 형광등 불빛이 자신을 비췄다. 차갑고 하얀 불빛. 그것은 마치 병원의 불빛과 같았다. 죽음의 방향을 가리키는 불빛처럼. 그리고 민준은 그 불빛 속에서 자신의 그림자를 봤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그림자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의 그림자를 자신의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처럼.
유리문을 밀고 나갔다. 밤 공기가 자신의 얼굴을 때렸다. 강남의 밤 공기. 그것은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았다. 마치 죽음의 숨결처럼. 아무것도 느끼지 않게 만드는 온도.
강남의 거리는 여전히 밝았다. 네온사인들. 차들의 불빛들. 빌딩들의 조명들. 모든 것이 밤하늘을 밝히고 있었다. 마치 태양이 떠 있는 것처럼. 하지만 그 모든 불빛이 민준을 밝혀주지는 못했다. 오히려, 그 불빛이 강할수록, 민준의 그림자는 더 짙어졌다.
“이게 뭐야… 이게 뭐야…”
민준이 중얼거렸다. 마치 주문을 외우는 것처럼. 마치 자신을 깨우려고 하는 것처럼. 하지만 자신은 깨어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것이 꿈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현실이었다. 그리고 현실은 꿈보다 더 무섭다.
민준의 휴대폰이 울렸다. 진동이 울렸다. 화면을 켰다. 준호였다. 드디어 준호가 연락을 했다.
‘지금 어디야?’
준호의 문자 메시지였다. 마치 사냥꾼이 먹이를 추적하는 것처럼. 마치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려고 하는 것처럼.
민준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마치 누군가이 자신의 손가락을 조종하고 있는 것처럼.
‘강남역 근처. 지금 어디 가면 돼?’
보내기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즉시 답장이 왔다.
‘집으로 가. 우리가 얘기할 게 있어.’
‘우리’라는 단어가 민준의 눈에 들어왔다. 준호와 이수진. 아니, 아마도 더 많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었다. 더스타의 경영진들. 그들 모두가 민준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이 할 일들의 리스트를 들고. 자신의 미래를 결정할 준비를 하고.
택시를 탔다. 기사님이 라디오를 틀었다. 심야 라디오. 누군가의 사연이 나오고 있었다. 연애 문제였다. 자신의 남자친구가 자신을 속였다고. 그리고 진행자가 말했다. ‘사람은 항상 변한다’고. ‘당신이 알고 있던 그 사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민준은 창밖을 봤다. 강남의 밤이 흘러가고 있었다. 차들. 사람들. 건물들. 모두가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자신을 제외한 모든 것이 자신의 속도보다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자신만이 멈춰 있었다. 자신만이 시간에 뒤처져 있었다.
밤 11시 47분. 시간 표시가 화면에 나왔다. 택시의 네비게이션에 나온 시간. 민준은 그 시간을 봤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이라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누군가에서 누군가의 것으로 변한 정확한 시간. 자신의 과거가 끝나고 자신의 미래가 시작된 정확한 시간.
차가 집 앞에 멈췄다. 창밖을 통해, 자신의 집이 보였다. 불이 켜져 있었다. 준호가 와 있다는 뜻이었다. 아마도 다른 사람들도 함께 있을 것이었다.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들. 자신의 인생을 결정할 사람들. 그리고 아마도, 자신을 감시할 사람들.
문을 열었다. 차에서 내렸다. 발이 땅에 닿는 순간, 민준은 자신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이 들어가는 그 문 안으로 들어가면, 자신은 다시는 예전의 민준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자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