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13화: 거짓의 온도
카페를 나간 지 40분이 지났을 때, 민준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깨달았다. 강남역이 아니라 신림역. 지하철을 탔던 기억이 없었다. 준호와의 대화가 어떻게 끝났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의 손가락이 극도로 차가웠다. 그것이 유일한 현실이었다. 손가락의 차가움. 그리고 그 차가움을 느끼고 있는 누군가가 자신 안에 있다는 것. 그 누군가는 살아있었다.
신림역의 에스컬레이터를 내려가며 민준은 자신의 휴대폰을 봤다. 준호로부터의 카톡. 오후 3시 47분.
“당신이 뭘 하고 있든, 계약서가 나올 때까지는 말하지 말아. 이수진이 알면 복잡해져. 이해해?”
그 다음은 오후 4시 12분.
“계약서에는 보수 비밀 유지 조항이 있을 거야. 그걸 서명하면, 당신은 이 드라마의 모든 것을 말할 수 없어. 캐스팅 과정, 급여, 스케줄, 심지어 이 드라마가 존재한다는 것까지. 이해해?”
그리고 오후 4시 51분.
“당신은 이미 주인공이야. 당신은 이미 선택된 거야.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어.”
민준은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준호의 말들은 마치 누군가가 자신의 목에 감은 줄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 줄이 점점 조여오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은 그 줄을 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 줄이 자신을 구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것이 자신을 죽이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신림역 출구로 나온 민준은 자신의 오피스텔로 가지 않았다. 대신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GS25. 그곳의 형광등은 극도로 밝았다. 마치 자신의 내부를 비추는 거울처럼. 민준은 편의점의 진열대 앞에 섰다. 라면. 김밥. 삼각김밥. 그리고 각종 음료들. 모두가 자신과는 무관한 것들이었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들. 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것들은 아니었다.
편의점 점원은 민준을 봤다. 그리고 인식하지 않았다. 민준은 여전히 누구도 인식하지 않는 그런 사람이었다. 주인공이 된 이후에도. 아니, 주인공이 되었기 때문에 더더욱. 왜냐하면 주인공은 스크린 안에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현실에서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 사람이다.
민준은 아무것도 사지 않고 편의점을 나갔다.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오후 5시 23분. 전화. 이수진. CEO. 그의 모든 것을 쥐고 있는 사람.
민준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대신 벨소리를 들었다. 4번. 그 다음 끊겼다. 그리고 문자가 왔다.
“민 배우, 지금 사무실에 올 수 있나요? 계약서 관련해서 논의할 게 있습니다.”
민준은 문자를 읽었다. 두 번. 세 번. 그 문장의 각 글자가 자신을 누르고 있었다. 지금. 사무실. 계약서. 논의. 모든 말들이 선택이 아닌 명령처럼 느껴졌다.
민준은 다시 지하철을 탔다. 신림역에서 강남역으로. 반대 방향. 마치 자신의 삶이 진자 운동을 하는 것처럼. 앞으로 나아갔다가 다시 뒤로 물러나고. 뒤로 물러났다가 다시 앞으로 나아가고. 그 반복 속에서 자신은 조금씩 소모되고 있었다.
더스타 엔터테인먼트의 건물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6시 8분이었다. 저녁이 깊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강남의 도시는 여전히 밝았다. 네온사인. 차들의 불빛. 빌딩의 조명들. 모든 것이 자신을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그 비춤 속에서 자신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이수진의 사무실은 20층에 있었다. 민준이 엘리베이터를 탈 때, 또 다른 직원들이 나왔다. 그들은 민준을 봤다. 그리고 알아봤다. 화제의 신인배우. 넷플릭스의 주인공. 하지만 그들의 눈빛에는 존경이 아니라 호기심이 있었다. 그것은 독사가 쥐를 바라보는 그런 호기심이었다.
20층의 복도는 조용했다. 대부분의 직원들이 떠난 시간이었다. 민준은 이수진의 사무실 문 앞에 섰다. 유리로 된 문. 그 너머로 이수진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책상 위에 무언가를 정렬하고 있었다. 종이. 문서. 계약서.
민준은 문을 두드렸다. 세 번. 그 다음 기다렸다.
“들어와.”
이수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명령이었다. 초대가 아니라.
민준은 문을 열었다. 이수진의 사무실은 생각보다 작았다. 창문 너머로는 강남의 야경이 보였다. 그리고 책상 위에는 계약서들이 있었다. 여러 장. 아마도 10장 이상. 하나의 계약이 아니라 여러 개의 계약서들이었다.
“앉아.”
이수진이 손짓했다. 민준은 책상 앞의 의자에 앉았다. 이수진은 여전히 서 있었다. 그녀의 키는 민준보다 작았지만, 그 작은 키가 극도로 크게 느껴졌다.
“박 PD로부터 연락을 받았어. 당신이 캐스팅되었다고.”
이수진이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감정이 없었다. 마치 날씨 예보를 읽는 그런 톤.
“네. 감사합니다.”
민준이 대답했다.
“감사할 필요는 없어. 이건 당신의 실력이 아니라 운이고, 타이밍이야. 그리고 누군가의 선택이지. 그 누군가가 당신을 원했기 때문이야.”
이수진이 책상 앞에 앉았다. 그녀의 얼굴이 조명 아래에서 극도로 명확했다. 피부의 결. 입가의 주름. 눈가의 검은 자국들. 모든 것이 극도로 선명했다.
“이게 계약서야.”
이수진이 한 장을 집어 들었다. 그것은 A4 용지였다. 양쪽 면에 글씨가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민준은 그것을 읽으려고 했지만, 글씨가 극도로 작았다.
“이 계약서의 핵심은 세 가지야.”
이수진이 계속했다. “첫 번째, 당신은 이 드라마에 관한 모든 정보를 비밀로 유지해야 해. 캐스팅 과정, 급여, 촬영 일정, 시나리오, 심지어 이 드라마의 존재 자체도. 두 번째, 당신은 이 드라마가 완성될 때까지 다른 어떤 프로젝트도 할 수 없어. 우리가 승인한 것만 가능해. 세 번째, 당신이 이 계약을 위반하면, 위약금 3억 원을 내야 해. 그리고 그 이상의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어.”
민준은 그 말들을 들으면서, 자신의 호흡이 얕아지는 것을 느꼈다. 3억 원. 그것은 자신의 4년치 월급이었다. 그것은 자신이 평생을 일해도 갚을 수 없는 액수였다.
“이해했어?”
이수진이 물었다.
“네. 이해했습니다.”
민준이 대답했다.
“그런데 한 가지 더 있어.”
이수진이 또 다른 문서를 집어 들었다. 이것은 계약서가 아니라 다른 종류의 문서였다. 어떤 협의서. 혹은 각서.
“이 드라마의 촬영 중에, 당신은 정신과 의료진과의 상담을 받아야 해. 의무적으로. 그리고 그 상담 기록은 우리가 보관해. 당신의 정신 건강을 위해서야.”
민준은 그 말을 들으면서, 자신의 얼굴이 극도로 창백해지는 것을 느꼈다. 정신과 의료진. 상담 기록. 우리가 보관해. 그것은 모두 자신의 과거를 의미하고 있었다. 지난 1권에서의 자신. 자살 시도. 그것을 이수진이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당신이 지난주에 한 일들을 알고 있어.”
이수진이 말했다. “당신이 어디에 있었는지, 뭘 했는지. 모두 알고 있어. 그리고 이 계약에는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조항이 있어. 만약 당신이 그런 일을 다시 하면, 우리는 그것을 공개할 수 있어. 당신의 정신 건강 기록과 함께. 이해해?”
민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의 입이 열리지 않았다. 자신의 목이 극도로 조여있었다. 마치 누군가의 손이 자신의 목을 조르고 있는 것처럼.
“질문이 있어?”
이수진이 물었다.
“이… 이건 협박이에요?”
민준이 극도로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수진은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것은 즐거운 웃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뭔가를 확인했을 때의 웃음이었다.
“협박이 아니야. 계약이야. 계약은 양쪽이 서명하는 거고, 양쪽이 이득을 보는 거야. 당신은 주인공이 되고, 우리는 당신을 관리해. 이것은 공정한 거래야.”
이수진이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극도로 차갑다. 그것은 얼음처럼 냉정하고, 돌처럼 단단했다.
“그런데 형이… 준호 형이…”
민준이 말했다.
“준호? 그가 뭘 했어?”
이수진이 물었다. 그리고 자신의 책상 위의 다른 문서를 집어 들었다. 그것은 민준의 이름이 써 있는 문서였다. 그리고 준호의 이름도 써 있었다.
“준호는 당신의 매니저야. 그리고 당신이 이 계약을 서명할 때, 그도 함께 서명해야 해. 왜냐하면 매니저도 책임이 있거든. 만약 당신이 계약을 위반하면, 준호도 책임을 져야 해. 그의 경력도 끝날 수 있어. 이해해?”
민준은 그 말을 들으면서, 자신의 세상이 극도로 좁혀지는 것을 느꼈다. 이것은 단순한 계약이 아니었다. 이것은 자신과 준호를 함께 묶는 올가미였다. 만약 자신이 움직이면, 준호도 함께 움직여야 하는. 만약 자신이 움직이지 않으면, 준호가 자신을 움직이게 하는. 그런 올가미.
“그래서 당신은 신중해야 해. 매우 신중해. 왜냐하면 당신이 하는 모든 선택이 다른 사람에게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야.”
이수진이 계속했다. “당신이 주인공이 된다는 것은 축하할 일이야. 하지만 동시에, 당신은 이제 많은 사람들의 기대와 책임을 지게 된 거야. 그리고 그 책임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만이, 진정한 주인공이 될 수 있어.”
민준은 그 말들을 들으면서, 자신이 극도로 작아지는 것을 느꼈다. 아니, 자신이 계속 작아져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4년 전, 신인배우로서의 자신. 그때도 자신은 작았다. 엑스트라. 조연. 보이지 않는 사람. 그리고 지금, 주인공이 된 자신도 여전히 작았다. 아니, 더 작아졌다. 왜냐하면 이제 자신은 온전히 자신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계약서를 읽어봐. 그리고 내일 준호와 함께 와. 서명을 위해서.”
이수진이 말했다. 그녀는 이미 다시 자신의 일로 돌아가고 있었다. 계약서들을 정렬하고 있었다. 마치 민준이 이미 사라진 것처럼.
민준은 계약서들을 들었다. 그것들은 극도로 무거웠다. 아니, 가벼웠다. 단지 종이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 종이의 무게가 자신의 모든 것을 누르고 있었다. 자신의 어깨. 자신의 가슴. 자신의 심장. 모든 것이 그 종이의 무게 아래에 있었다.
“한 가지만 더 묻고 싶어요.”
민준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극도로 작았다.
“뭐?”
이수진이 물었다. 그녀는 민준을 보지 않고 있었다.
“형이… 준호 형이 어제 밤에 나한테 뭔가를 했어요. 그리고 그 뭔가가 이 모든 것과 관련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형이 나한테 말할 수 없다고 했어요. 그리고 지금, 당신이 나에게 말할 수 없는 계약을 강요하고 있어요. 그래서 묻고 싶은 거예요. 제가 뭘 모르고 있는 건가요? 제가 뭘 놓치고 있는 건가요?”
민준이 말했다.
이수진은 그 말을 들으면서, 자신의 펜을 멈췄다. 극도로 미세한 움직임. 하지만 민준에게는 명확했다. 그녀가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말할 수 없다는 것. 혹은 말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것.
“당신이 알 필요는 없어.”
이수진이 말했다. “당신은 그냥 배우면 돼. 주인공이 되고, 연기하고, 계약을 지켜. 그게 전부야.”
“그런데 그건 연기가 아니라 거짓이에요.”
민준이 말했다.
이수진은 그 말을 들으면서, 자신의 책상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민준을 마주봤다. 그녀의 눈빛은 극도로 차갑다. 마치 얼음이 된 것처럼. 아니, 그보다 더 차갑다. 우주의 진공처럼.
“배우라는 직업이 뭘까?”
이수진이 물었다. “배우는 거짓을 말해. 배우는 다른 사람의 삶을 산다고 거짓말을 해. 배우는 자신이 느끼지 않는 감정을 느낀다고 거짓말을 해. 배우는 사실이 아닌 것들을 진실처럼 보이게 해. 그게 배우의 직업이야. 그래서 당신이 거짓을 말하고 있다는 것은, 당신이 제대로 된 배우라는 뜻이야.”
이수진이 말했다.
“그런데 저는 더 이상 거짓을 말할 수 없어요.”
민준이 말했다.
이수진은 웃음을 터뜨렸다. 이번에는 진정한 웃음이었다. 극도로 크고, 극도로 깊은 웃음. 마치 누군가의 영혼을 꺼내는 그런 웃음.
“그럼 배우를 그만둬. 그게 가장 쉬운 길이야.”
이수진이 말했다.
민준은 그 말을 들으면서, 자신의 모든 것이 순간적으로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주인공. 계약. 준호. 모든 것. 그리고 자신이 남겨지는 것을 느꼈다. 아무것도 아닌 누군가로. 4년을 견뎌낸 모든 것이 무의미한 누군가로.
“그럴 거 같아요.”
민준이 극도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뭐가?”
이수진이 물었다.
“저는… 배우를 그만두는 길을 걷고 있는 것 같아요.”
민준이 말했다.
이수진은 그 말을 들으면서, 자신의 책상에 다시 앉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웃음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즐거운 웃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뭔가를 완벽하게 예측했을 때의 웃음이었다. 마치 체스판에서 상대방의 모든 수를 읽은 그런 웃음.
“당신은 그만두지 않을 거야.”
이수진이 말했다. “왜냐하면 당신은 이미 선택된 사람이거든. 그리고 선택된 사람은 선택을 할 수 없어. 선택된 사람은 단지 그 선택 속에서 움직일 뿐이야. 그게 당신의 운명이야. 그리고 당신은 그것을 받아들일 거야.”
민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계약서들을 들었다. 그것들은 여전히 무거웠다. 그리고 극도로 차갑다. 마치 죽음의 온도처럼.
그는 이수진의 사무실을 나갔다. 뒷걸음질로. 마치 어떤 의식 속에서 나오는 것처럼. 그리고 문을 닫았을 때, 자신이 극도로 혼자라는 것을 깨달았다.
휴대폰이 울렸다. 오후 8시 34분. 준호. 텍스트.
“계약서는 어때? 문제 없어?”
민준은 그 문자를 읽었다. 그리고 답장을 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손가락을 바라봤다. 여전히 차가웠다. 그 차가움이 자신의 유일한 현실였다. 그리고 그 차가움 속에서만, 자신은 여전히 살아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강남역의 지하철 플랫폼에 서 있는 민준. 옆에는 수십 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자신의 세상에 몰입되어 있었다. 휴대폰. 신문. 책. 아무것도 보지 않는 눈빛. 모든 사람이 자신의 세상 안에서만 살고 있었다. 그리고 민준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의 세상 안에서만. 자신의 거짓 안에서만.
지하철이 도착했을 때, 민준은 탈지 말까 봤다. 그냥 여기 서 있을까 봤다. 영원히. 움직이지 않고. 선택하지 않고. 그냥.
하지만 그는 탔다. 지하철 안으로. 신림역으로. 자신의 반지하 오피스텔로. 자신의 텅 빈 방으로. 자신의 거짓으로.
문을 열었을 때, 자신의 방은 극도로 어두웠다. 그는 불을 켜지 않았다. 대신 창문을 열었다. 신림역의 야경. 그것도 거짓이었다. 모두가 거짓이었다. 밝음도 거짓. 어둠도 거짓. 그리고 자신도 거짓이었다.
민준은 침대에 누웠다. 계약서들을 자신의 가슴에 올려놓고. 그리고 깨달았다. 이수진의 말이 맞다는 것을. 자신은 배우를 그만두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은 이미 선택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택된 사람은 선택을 할 수 없다. 선택된 사람은 단지 그 선택 속에서 움직일 뿐이다.
그리고 그 움직임 속에서, 자신은 점점 사라져가고 있었다.
오후 9시 12분. 준호로부터의 전화. 민준은 받지 않았다. 그 대신 준호의 목소리를 상상했다. 그 목소리가 말할 내용을 상상했다. 계약서 서명. 내일 회사로. 준비해. 모든 것을 숨겨.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아.
민준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 모든 것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를. 1권에서의 자신. 그때도 자신은 선택된 사람이 아니라, 버려진 사람이었다. 그리고 준호가 자신을 구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자신은 깨달았다. 준호가 자신을 구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더 깊은 함정으로 끌어당겼다는 것을.
그리고 자신은 그 함정을 선택했다. 아니, 선택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자신은 이미 선택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계약서들이 자신의 가슴을 누르고 있었다. 그 무게 속에서 민준은 서서히 질식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마지막 숨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아무도 그것을 막을 수 없었다. 준호도 아니고. 이수진도 아니고. 그리고 자신도 아니었다.
오후 10시 47분. 민준의 휴대폰에 또 다른 문자가 왔다. 이번에는 알 수 없는 번호에서.
“당신이 선택한 것 같은데, 실제로는 당신을 선택한 것들이 있어요. 그것들이 뭘까요? 당신은 알까요?”
민준은 그 문자를 읽었다. 여러 번. 그리고 깨달았다. 자신이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을. 선택한 것들이 뭔지. 그리고 그것들이 자신을 어디로 데려갈 것인지를.
그것은 파멸이었다. 극도로 느리고, 극도로 정교한 파멸. 그리고 그 파멸 속에서 자신은 주인공처럼 보일 것이다. 화려한 조명 아래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박수 속에서. 그리고 그 모든 것이 거짓일 것이다.
민준은 계약서의 첫 페이지를 들었다. 그리고 읽기 시작했다. 복잡한 법률 용어들. 의무. 책임. 위약금. 모든 것이 자신을 묶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 속에서 서명하려고 했다.
손가락이 극도로 차가웠다. 여전히. 그리고 그 차가움만이, 자신이 아직 살아있다는 증거였다.
# 선택된 자의 숨
## 1부: 역에서
지하철 신림역의 승강장은 오후 8시 45분, 사람들로 가득했다. 민준은 맨 끝에 서 있었다. 흰색 이어폰이 귀에서 빠져 목에 걸려 있었고, 그의 양손은 주머니 속에서 계약서의 모서리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종이의 질감은 차갑고 딱딱했다. 사실 계약서는 주머니에 없었다. 그것은 모두 그의 머리 속에만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게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었다.
“다음 열차: 신림역 행, 30초 후 도착합니다.”
자동 음성 안내가 울려 퍼졌다. 민준은 그 소리를 들었지만 처리하지 못했다. 그의 뇌는 이미 과부하 상태였다. 준호와의 마지막 통화. 이수진의 말들. 그 문자 메시지. 모든 것이 한꺼번에 밀려들어 왔다.
‘그냥 여기 서 있을까?’
그 생각이 떠올랐을 때, 민준은 마치 누군가의 손이 자신의 목을 조르는 것 같은 감각을 느꼈다. 공기가 자신의 폐로 들어오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정상적으로 숨을 쉬고 있었다. 다만 그 숨이 자신의 것이 아닌 것 같은 착각이 들었을 뿐이었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 숨을 쉬고 있고, 그 숨이 마치 자신의 폐를 통과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영원히. 움직이지 않고. 선택하지 않고. 그냥.’
이것이 자신의 마지막 선택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의 맨 끝에 서서, 사람들이 지나가는 것을 보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기. 영원히. 시간이 멈추는 것처럼 느껴질 때까지. 그렇게 되면 어떨까? 준호도 더 이상 전화하지 않을 것이다. 회사도 자신을 찾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혼자만의 선택. 유일한 진정한 선택.
하지만 그순간, 지하철이 도착했다.
반짝이는 철의 광채가 터널에서 나타났고, 그 소리는 거대한 굉음으로 승강장을 흔들었다. 민준은 그 소리에 몸을 떨었다. 현실이 그를 잡아채고 있었다. 영원이 사라지고, 시간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승객들이 밀려나갔고, 새로운 승객들이 밀려들어왔다. 민준도 그 흐름에 함께였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아니, 자신의 의지가 이미 이곳에 없었으므로, 단순히 관성의 흐름일 뿐이었다.
지하철 안은 습하고 뜨거웠다. 사람들의 체온이 공기를 데우고 있었고, 누군가의 향수 냄새와 누군가의 소주 냄새가 섞여 있었다. 민준은 그 냄새를 마시면서 창밖을 바라봤다. 검은 터널만 보였다. 그 검은 터널 속에서 자신은 빨려 들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신림역입니다. 문이 닫힙니다.”
그는 탔다. 지하철 안으로. 신림역으로. 자신의 반지하 오피스텔로. 자신의 텅 빈 방으로. 자신의 거짓으로.
선택이 아니었다. 흐름이었다. 그리고 그 흐름 속에서 자신은 점점 더 작아져 가고 있었다.
## 2부: 방
반지하 오피스텔의 계단을 올라가면서 민준은 자신의 호흡음을 들었다. 거칠고 불규칙했다.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이 자신의 몸을 빌려 숨을 쉬고 있는 것 같았다. 계단의 금속 난간은 차갑고 끈기 있었다. 손가락이 그것을 따라가면서 감각이 점점 둔해지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손이 아닌 것처럼.
“문 따는데 5분 정도 걸릴 듯해요. 열쇠가…”
옆 방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는 민준의 뇌에 진동을 일으켰다. 다른 사람의 삶. 다른 사람의 선택. 다른 사람의 문제. 얼마나 부럽고 얄미웠던가.
방 문을 열었을 때, 반지하 방은 극도로 어두웠다. 밖은 아직도 완전히 검지 않았다. 저녁 하늘은 짙은 보라색이었고, 가로등들이 희미하게 켜지고 있었다. 하지만 반지하 방에는 그 빛이 닿지 않았다. 오직 검은색만 있었다. 극도로 진한 검은색. 마치 누군가가 검은색 물감으로 방 전체를 칠해놓은 듯했다.
민준은 불을 켜지 않았다. 대신 창문을 열었다.
창문을 열자 신림역의 야경이 들어왔다. 밝은 조명들. 사람들의 움직임. 자동차의 불빛. 모두가 자신의 방으로 침입해 왔다. 하지만 그것도 거짓이었다. 그것들은 모두 자신이 속할 수 없는 세상의 조각들일 뿐이었다. 밝음도 거짓. 어둠도 거짓. 그리고 자신도 거짓이었다.
창문에서 새어 들어오는 야경의 불빛이 자신의 얼굴을 비추었다. 거울이 없어도 자신은 알았다. 그 얼굴은 배우의 얼굴이 아니었다. 연기하는 얼굴이었다. 배우가 아닌, 배우 역을 하고 있는 누군가의 얼굴이었다.
침대에 누웠다. 계약서들을 자신의 가슴에 올려놓고. 실제로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무게는 실재했다. 수십 킬로그램의 무게가 자신의 가슴을 누르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자신의 위에 앉아 있는 것처럼.
천장을 바라봤다. 반지하이므로 천장은 지표면의 일부였다. 몇 센티미터 위에는 도로가 있었다. 자동차가 지나가면 천장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각 진동이 자신의 뼈를 타고 흘러내렸다. 나는 지표면 아래에 있다. 관 속에 있다. 죽은 자의 방에 있다.
이때였다. 깨달음이 왔다.
이수진의 말이 맞다는 것을. 자신은 배우를 그만두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은 이미 선택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택된 사람은 선택을 할 수 없다. 선택된 사람은 단지 그 선택 속에서 움직일 뿐이다.
‘1권에서 나는 누구였지?’
그 기억을 더듬어 보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은 마치 다른 사람의 삶을 기억하려고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당시의 민준이는 누구였나? 버려진 사람이었다. 고아원을 나온 아이. 아무도 원하지 않는 존재. 그런데 준호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가 자신을 구했다고 생각했다. 명석한 머리. 입술 가장자리의 미소. 그 모든 것이 구원처럼 보였다.
그런데 이제 자신은 깨달았다.
준호가 자신을 구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더 깊은 함정으로 끌어당겼다는 것을. 아니, 그것도 부정확했다. 준호는 자신을 함정으로 끌어당기지 않았다. 자신이 스스로 그 함정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은 점점 더 자신이기를 포기했다.
“배우가 되고 싶어?” 준호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난 너를 도와줄 수 있어.”
그 말이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그리고 그 말이 얼마나 치명적이었는가.
침대에 누운 채로 팔을 들었다. 천장을 향해. 마치 누군가를 밀어내려고 하는 듯이. 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공기뿐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팔은 공기를 헤치며 천천히 내려앉았다.
## 3부: 호출
오후 9시 12분.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는 “준호”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 민준은 그 화면을 바라봤다. 화면의 불빛이 자신의 눈을 자극했다. 그 자극은 쾌감이 아니었다. 그것은 고통이었다.
민준은 받지 않았다.
대신 그의 머리는 준호의 목소리를 상상하기 시작했다. 그 목소리가 말할 내용을 정확하게 예측했다. 마치 대본을 읽은 배우가 연기하듯이.
“민준아. 너 왜 안 받어? 계약서 봤지? 내일 회사로 와. 아침 10시. 준비해. 모든 것을 숨겨.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아. 이건 너를 위한 거야. 너를 위한 선택이야.”
그 목소리는 얼마나 부드러웠을까? 얼마나 확신에 찼을까? 그리고 얼마나 거짓이었을까?
민준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또 다른 깨달음이 왔다.
1권. 그때도 자신은 선택된 사람이 아니라, 버려진 사람이었다. 고아원의 마지막 날. 자신은 아무도 자신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입양될 가능성은 점점 낮아졌다. 그리고 자신은 그것을 받아들였다. 이 세상에서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다. 선택받지 않은 자. 버려진 자.
그런데 그때였다. 준호가 나타났다.
“넌 배우가 될 수 있어. 나는 알아. 다른 사람들은 모르지만, 나는 안다. 넌 특별해.”
그 말이 얼마나 달콤했는가. 자신을 선택해주는 누군가. 자신을 특별하다고 말해주는 누군가. 마치 신이 내려온 것 같았다.
하지만 신은 없었다. 오직 함정만 있었다.
“준호가 나를 구한 게 아니었다. 준호가 나를 선택한 게 아니었다. 준호는… 나를 도구로 본 거야.”
그 생각이 자신의 목을 조르는 것 같았다. 호흡이 얕아졌다. 가슴이 철렁했다. 하지만 울지는 않았다. 울음은 이미 자신에게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휴대폰의 화면이 어두워졌다. 준호는 더 이상 전화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자신의 머리 속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 4부: 계약
계약서의 첫 페이지를 들었다.
종이의 질감이 손가락에 전달되었다. 매끄럽지만 딱딱한 질감. 마치 누군가의 피부처럼. 차갑고 생명이 없는 피부.
읽기 시작했다.
“본 계약서는 갑 (주식회사 준호 엔터테인먼트)과 을 (민준)간의 전속 계약을 규정한다.”
전속. 그 단어가 자신의 시선을 붙들었다. 전속 계약. 즉, 다른 곳으로 갈 수 없다는 뜻이었다. 다른 선택을 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자신은 준호의 것이 된다는 뜻이었다.
“제2조: 계약자는 회사의 모든 지시에 따를 의무가 있으며…”
의무. 그 단어도 차가웠다. 자신이 따라야 할 의무들. 배우로서의 의무. 계약자로서의 의무. 인간으로서의 의무는 없었다.
“제5조: 계약을 위반할 경우, 계약자는 위약금으로 3억 원을…”
3억 원. 그 숫자가 자신의 눈 앞에서 계속 반짝였다. 자신이 벌 수 없는 액수. 자신이 평생을 벌어도 갚을 수 없는 액수. 이것이 바로 함정의 치명성이었다. 돈으로 묶여 있는 것이다. 법률로 묶여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영혼으로 묶여 있는 것이다.
계약서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었다. 서명 란이 있었다. 민준의 이름을 적을 공간이 있었다. 하지만 아직 서명하지는 않았다. 아직도 한 가지 선택이 남아 있었다.
‘서명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그 생각이 떠올랐을 때, 자신은 이미 그 답을 알고 있었다. 준호는 자신을 찾아올 것이다. 회유할 것이다. 협박할 것이다. 그리고 결국 자신은 서명할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은 이미 그것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아니, 자신이 선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창문을 통해 신림역의 야경이 보였다. 밝은 조명들. 사람들의 움직임. 그 모든 것이 자신의 세상이 아니었다. 자신의 세상은 이 반지하 방이었다. 그리고 이 계약서였다.
## 5부: 메시지
오후 10시 47분. 휴대폰에 문자가 왔다. 이번에는 알 수 없는 번호에서였다.
“당신이 선택한 것 같은데, 실제로는 당신을 선택한 것들이 있어요. 그것들이 뭘까요? 당신은 알까요?”
민준은 그 문자를 읽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열 번. 그 문자를 읽을 때마다 자신의 심장이 한 박자씩 빨라졌다.
‘누구에게서 온 거야?’
화면을 확인했지만 발신자 정보는 없었다. 단지 “알 수 없는 번호”라고만 표시되어 있었다.
하지만 자신은 이미 알고 있었다. 누가 이 문자를 보냈는지. 그리고 왜 보냈는지.
그것은 자신 자신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자신이 될 수 있었던 다른 버전의 자신이었다. 선택된 자가 아닌, 선택하는 자의 버전. 하지만 그런 자신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자신은 이미 죽어있었다.
“그것들이 뭘까요? 당신은 알까요?”
그 질문에 답하려고 애썼다. 그것들이 뭔가? 돈? 명예? 사랑? 아니. 그것들은 그런 간단한 것들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이 세상의 구조 자체였다. 약자가 강자에게 선택되는 구조. 버려진 자가 누군가의 도구가 되는 구조. 그리고 자신이 그 구조 속에서 점점 사라지는 구조였다.
침대에 누운 채로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그 문자는 여전히 자신의 눈 앞에 떠 있었다. 마치 유령처럼.
## 6부: 파멸
그리고 자신은 깨달았다. 자신이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을. 선택한 것들이 뭔지. 그리고 그것들이 자신을 어디로 데려갈 것인지를.
그것은 파멸이었다.
극도로 느리고, 극도로 정교한 파멸.
마치 누군가가 자신의 몸을 천천히 녹이고 있는 것처럼. 마치 누군가가 자신의 영혼을 한 조각씩 떼어내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자신은 그것을 느끼고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파멸 속에서, 나는 주인공처럼 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