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11화: 회의실의 거울
PD 박미라는 민준이 들어오는 순간 자신의 노트북을 닫았다. 그 동작이 너무 빠르고 정확해서, 마치 오래전부터 연습한 제스처 같았다. 회의실의 조명은 극도로 밝았다. 천장의 LED 패널들이 모든 것을 명백하게 드러내는 빛을 쏟아내고 있었고, 그 아래에서 민준의 그림자는 극도로 짙었다.
“민 배우, 반갑습니다.”
박미라가 일어서면서 말했다. 그녀의 나이는 대략 50대 초반. 얼굴에는 주름이 많았지만, 눈빛은 극도로 날카로웠다. 마치 무언가를 지속적으로 분석하고 있는 그런 눈빛. 민준은 그 눈을 마주했을 때, 자신의 내부가 조명 아래에서 벗겨지는 것처럼 느꼈다.
“감사합니다, PD님.”
민준이 인사했다. 준호가 옆에 있었다. 그는 이미 박미라와 인사를 나눈 것 같았다. 자연스럽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서 있었다. 그의 존재는 거기 있으면서도, 거기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앉으세요.”
박미라가 손짓했다. 민준은 의자에 앉았다. 테이블의 반대편. 박미라와 자신 사이에는 약 1미터의 거리가 있었다. 그 거리는 면접의 거리였다. 혹은 심문의 거리였다. 민준은 자신의 손을 테이블 위에 놓았다. 어제 피자 가게에서처럼. 떨리지 않게.
“네, PD님.”
“민 배우, 당신이 지난주 스크린 테스트에서 한 연기를 봤습니다.”
박미라가 말했다. 그녀는 아무 종이도 들지 않고 있었다. 마치 이미 모든 것을 암기한 사람처럼 말했다.
“네.”
“당신은 그 장면에서 뭘 느꼈나요?”
박미라가 물었다.
민준은 그 질문을 받으면서, 자신의 가슴이 빠르게 뛰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이것은 기술적인 질문이 아니었다. 이것은 심리적인 질문이었다. 배우가 자신의 역할 속에서 무엇을 느꼈는가에 대한 질문. 그리고 민준은 지난주 스크린 테스트에서 무엇을 느꼈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죽음.
그것뿐이었다.
“죽음을 느꼈습니다.”
민준이 말했다. 그 말이 입에서 나가자마자, 준호가 매우 미세하게 움직였다. 극도로 작은 움직임. 단지 민준에게만 느껴지는 움직임.
박미라의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죽음을요. 그걸 어떻게 알았나요?”
“스크립트에서 그 감정이 보였습니다. 제 캐릭터는 누군가를 잃어가고 있었고, 그걸 막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죽음을 느꼈습니다.”
민준이 대답했다.
박미라는 민준의 얼굴을 오래 바라봤다. 그 시간이 얼마나 길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민준에게는 영원 같았다.
“당신이 이 역할을 원하나요?”
박미라가 물었다.
“네.”
“왜?”
“제가 죽음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민준이 말했다. 그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진실도 아니었다. 그것은 배우의 말이었다. 캐릭터의 말이었다. 아니면 캐릭터가 되려고 하는 사람의 말이었다.
박미라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것은 즐거운 웃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뭔가를 확인했을 때의 웃음이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기대했던 대답을 받은 그런 웃음.
“좋습니다.”
박미라가 말했다.
“저희는 당신을 주인공으로 캐스팅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회의실 안의 공기가 정지했다. 마치 시간 자체가 멈춘 것처럼. 민준은 자신의 심장이 뛰는 것을 들었다. 그것은 기쁨이었을까, 아니면 공포였을까.
“감사합니다.”
민준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극도로 낮았다.
“그런데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박미라가 계속했다.
“네?”
“당신은 이 역할을 위해 자신을 완전히 변형해야 합니다.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감정적으로. 이것은 극도로 어려운 작업이 될 것입니다. 당신은 이것을 감당할 수 있나요?”
민준은 그 질문을 들으면서, 자신이 지난주 스크린 테스트에서 한 연기를 다시 생각했다. 그 안에서 자신이 느꼈던 죽음의 감각. 그리고 그 죽음의 감각이 자신을 어떻게 변형시켰는지. 자신의 목소리를 어떻게 낮추게 했고, 자신의 눈빛을 어떻게 흐릿하게 했는지.
“네. 감당할 수 있습니다.”
민준이 대답했다.
“좋습니다. 그럼 계약서를 준비하겠습니다.”
박미라가 말했다. 그리고 자신의 노트북을 다시 열었다. 화면에는 뭔가가 떠올라 있었다. 문서. 혹은 이미지. 혹은 그 무엇. 하지만 민준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PD님.”
민준이 다시 인사했다.
“당신의 이름이 발표되면, 당신의 삶은 완전히 바뀔 것입니다.”
박미라가 말했다. 그 말은 축하가 아니었다. 그것은 경고였다.
“알겠습니다.”
민준이 대답했다.
박미라는 민준을 더 이상 보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노트북 화면을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극도로 빠르게 뭔가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마치 민준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회의실을 나올 때, 민준은 자신이 한 호흡을 하지 않은 것을 깨달았다. 아니, 여러 번의 호흡을 한 것 같지만, 그 호흡이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다른 누군가가 자신의 몸을 빌려서 숨을 쉬고 있는 것처럼.
복도의 조명은 회의실보다 훨씬 부드러웠다. 하지만 민준의 눈에는 여전히 극도로 밝게 느껴졌다.
“축하해.”
준호가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가면서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감정이 없었다.
“형…”
민준이 말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얘기하자.”
준호가 말했다. 그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곧 도착할 것 같았다.
그들이 엘리베이터에 탔을 때, 준호는 즉시 말했다.
“넌 지금 뭘 한 거야?”
“네?”
민준이 되물었다.
“넌 박미라 PD한테 뭘 말했어? 죽음을 느꼈다고? 죽음을 이해한다고?”
준호의 목소리는 극도로 낮았다. 하지만 그 낮음 속에는 뭔가가 있었다. 분노. 혹은 공포.
“배우로서의 대답을 했어요.”
민준이 말했다.
“배우로서? 민준아, 너는 지금 배우가 아니야. 너는 사람이야. 그리고 사람은 죽음을 느껴서는 안 된다.”
준호가 말했다.
“그럼 뭘 느껴야 해요?”
민준이 물었다.
“삶을. 너는 삶을 느껴야 해.”
준호가 대답했다.
엘리베이터가 8층을 지나갔다.
“형이 어제 밤에 나한테 한 말이 뭐였어요?”
민준이 다시 물었다.
“나중에.”
준호가 반복했다.
“형이 계속 나중에라고 말해요. 언제까지 나중일 거예요?”
민준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것은 질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절규였다. 극도로 억제된 절규였지만.
준호는 민준을 바라봤다. 그의 눈빛이 다시 변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의 그 차가운 눈빛이 아니었다. 그것은 더 깊은 것이었다. 더 오래된 것이었다. 마치 수십 년 동안 억제해온 감정이 표면으로 올라오는 그런 눈빛.
“형이 하고 싶은 말이 뭐예요?”
민준이 조용히 물었다.
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엘리베이터의 버튼판을 바라봤다. 1층이 거의 다 왔다.
“형, 어제 밤에 형이 나한테…”
민준이 다시 시작했다.
엘리베이터가 로비에 도착했다.
“나가자.”
준호가 말했다.
그들은 로비를 지나갔다. 강남의 햇빛이 유리창을 통해 들어오고 있었다. 정오의 햇빛. 가장 강렬한 시간의 빛.
거리에 나온 준호는 멈췄다. 신림로가 아닌 테헤란로였다. 자동차들이 끊임없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 소음 속에서 준호의 목소리는 더 작아졌다.
“민준아.”
“네?”
“넌 지금 뭘 원하고 있어?”
준호가 물었다.
“네?”
민준이 되물었다.
“넌 지금 배우가 되고 싶어? 아니면 살고 싶어?”
준호가 극도로 천천히 말했다.
민준은 그 질문을 받으면서, 자신의 가슴 안에서 뭔가가 부서지는 것을 느꼈다. 아니, 부서진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갈라지는 것이었다. 자신의 내부가 둘로 갈라지는 것. 배우로서의 자신과 사람으로서의 자신 사이에 깊은 틈이 생기는 것.
“둘 다 원해요.”
민준이 말했다.
“둘 다는 불가능해. 선택해야 해.”
준호가 말했다.
“왜 선택해야 해요?”
민준이 물었다.
“왜냐하면 이 업계에서는 그렇게 되어 있으니까.”
준호가 대답했다.
그들은 테헤란로를 따라 걸었다. 민준은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알 수 없었다. 단지 준호를 따라갔다.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준호는 자신의 휴대폰을 꺼냈다. 그리고 뭔가를 보기 시작했다.
“형?”
민준이 말했다.
“응?”
“형이 어제…”
“민준아.”
준호가 끊었다.
“지금은 말할 수 없어. 나중에. 진짜로 나중에.”
“언제가 나중이에요?”
민준이 물었다.
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휴대폰 화면을 민준에게 보였다. 그것은 뉴스 기사였다. 헤드라인이 떠올라 있었다.
“신인 배우 민준, 넷플릭스 차기작 주인공 캐스팅… ‘차세대 연기파’ 기대감”
기사의 발행 시간은 11시 47분이었다. 아직 회의실에서 나온 지 2분밖에 안 되었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기사가 나왔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민준은 알고 있었다. 이것이 연예계의 속도였다. 결정과 발표 사이에는 거의 시간이 없었다.
“이제 시작이야.”
준호가 말했다.
“뭐가?”
민준이 물었다.
“모든 것이. 너의 삶이 시작되는 거야. 아니면 너의 죽음이. 둘 중 하나.”
준호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극도로 낮았다. 마치 자신도 그 말을 믿지 않는 것처럼.
민준은 자신의 휴대폰을 들었다. 이미 여러 개의 메시지가 들어와 있었다. 회사의 직원들로부터. 배우들로부터. 그리고 마지막 메시지는 우리였다.
“축하해. 하지만 이제 조심해. 넷플릭스 주인공이라는 건 축제의 시작이 아니라, 전쟁의 시작이야.”
민준은 그 메시지를 읽으면서, 자신이 지난주 스크린 테스트에서 느꼈던 그 죽음의 감각을 다시 느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것이 배역 속의 죽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의 죽음이었다. 혹은 자신이 알고 있던 사람으로서의 자신의 죽음이었다.
“형이 나한테 뭘 원해요?”
민준이 다시 물었다.
준호는 테헤란로의 오후 햇빛 속에서 멈췄다. 자동차들이 옆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들의 엔진음은 거대했다. 그 소음 속에서 준호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형이 원하는 건…”
준호가 극도로 천천히 말했다.
“형이 원하는 건 너야. 하지만 너를 완전히 잃기 전에. 알겠지?”
민준은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몸은 이해하고 있었다. 자신의 가슴이 빠르게 뛰는 방식으로. 자신의 손이 떨리는 방식으로.
“네.”
민준이 대답했다.
그들은 다시 걸었다. 테헤란로를 따라. 민준은 자신의 발이 어떤 리듬으로 움직이고 있는지를 의식하고 있었다. 그것은 준호의 발걸음과 동기화되어 있었다. 마치 한 몸처럼.
카페에 들어갔을 때, 민준은 자신의 휴대폰을 다시 확인했다. 또 다른 메시지들이 들어와 있었다. 배우들로부터. 스태프들로부터. 그리고 한 번은 본 적 없는 번호에서 온 메시지도 있었다.
“민 배우, 축하합니다. 이제부터는 조심하세요. 당신은 이제 많은 사람들의 시선 속에 있습니다.”
발신인은 알 수 없었다.
준호는 에스프레소를 주문했다. 블랙. 아무것도 섞지 않은. 민준은 같은 것을 주문했다.
“형이 지난밤에…”
민준이 다시 시작했다.
“민준아. 지금은 진짜 안 돼. 시간이 필요해.”
준호가 말했다.
“시간이 필요하다고요? 형이 말했잖아요. 형이 나를 원한다고.”
“그래. 그래서 더 위험해.”
준호가 대답했다.
그들은 카페에 앉아서 에스프레소를 마셨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단지 커피의 쓴맛을 느낄 뿐이었다.
민준의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이수진이었다. 또 다른 지시. 또 다른 명령. 또 다른 계약.
세상은 극도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고, 민준은 그 속에서 자신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 서울의 그림자 속에서
## 1부: 메시지들
민준은 카페 창가에 앉아 있었다. 강남역 근처의 한적한 카페였다. 회색 콘크리트 건물들이 창 밖으로 보였고, 오후 햇빛은 창유리를 통해 황금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의 손에는 스마트폰이 들려 있었고, 화면에는 수십 개의 미읽 메시지가 쌓여 있었다.
그는 화면을 켰다 껐다를 반복했다. 마치 꿈인지 현실인지 확인하려는 듯이.
넷플릭스 주인공. 한국 드라마의 주인공.
단어들이 자꾸만 떠올랐다. 마치 누군가 그의 뇌 속에 직접 쓰고 있는 것처럼. 그 단어들은 무거웠다. 돌처럼 무거웠다. 그리고 점점 무거워지고 있었다.
휴대폰을 다시 켰다. 이번엔 눈을 제대로 떠서 메시지들을 읽기로 결심했다.
**회사 대표: “축하한다. 내일 회의 소집. 마케팅 전략 수립.”**
**배우 선배 A: “오마이갓!!! 축하축하!!! 우리 같이 밥 먹자!!”**
**배우 선배 B: “민준이 이제 스타네. 나도 소개 좀 해줄 수 있나? ㅎㅎ”**
**이수진 (매니저): “긴급. 내일 아침 8시 사무실. 스케줄 조정 필요.”**
메시지들이 계속 들어왔다. 마치 파도처럼. 그 파도 속에서 민준은 천천히 익사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마지막 메시지. 번호는 저장되어 있지 않았다. 발신인만 있을 뿐. ‘준호(형)’.
*“축하해. 하지만 이제 조심해. 넷플릭스 주인공이라는 건 축제의 시작이 아니라, 전쟁의 시작이야. 오늘 저녁 6시. 테헤란로에서 만나자.”*
민준은 그 메시지를 읽으며 몸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준호. 그의 형. 아니, 더 정확히는 그의 과거였다. 대학 때부터 알아온 사람. 배우 준비생 시절 함께 수업을 들었던 사람. 하지만 준호는 어느 순간부터 배우의 길을 포기했다. 또는 배우의 길이 준호를 포기했다. 민준은 정확히 어느 쪽인지 알 수 없었다.
그것은 3년 전의 일이었다. 그 이후로 준호와는 거의 연락이 없었다. 가끔 SNS에서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을 뿐이었다. 대충 본 사진들에서 준호는 항상 어두워 보였다. 마치 그림자 속에 사는 사람처럼.
그런데 오늘 갑자기 연락이 왔다. 축하한다는 메시지와 함께.
민준은 커피를 마셨다. 아메리카노였다. 거의 차가워진 상태였다. 그가 주문한 지 거의 한 시간이 흘렀으니까. 입안에서 커피의 쓴맛이 퍼졌다. 혀에 남은 그 쓴맛은 은은하게 목구멍으로 내려갔다.
*넷플릭스 주인공이라는 게 정말 좋은 거야?*
그 질문이 자꾸만 떠올랐다.
민준은 지난주를 떠올렸다. 스크린 테스트의 날. 카메라 앞에 서 있던 자신. 배역 속의 자신. 그 배역은 극도로 외로운 사람이었다. 가족에게 버림받고, 연인에게 배신당하고, 친구에게 욕설을 들으며 살아가는 사람. 그 배역을 연기하면서 민준은 뭔가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마치 자신이 정말로 그 배역이 되어가는 것 같은 기분. 마치 자신의 실제 생명이 무대 위에서 죽어가는 것 같은 기분.
감독은 “완벽해”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민준의 심장은 뭔가 낯선 감정으로 떨렸다. 기쁨이 아니었다. 그것은 두려움이었다. 깊고 어두운 두려움.
## 2부: 테헤란로의 오후
오후 5시 45분. 민준은 테헤란로에 도착했다.
거리는 북적였다. 회사원들이 퇴근을 서두르고 있었다. 여성들은 하이힐을 신은 발로 빠르게 걸어가고 있었다. 남성들은 넥타이를 매듭짓지 않은 채로 걸어다니고 있었다. 모두가 어디론가 가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여기가 아닌 어딘가로.
민준도 그런 마음이었을까? 예전에?
이제 그런 생각을 할 여유가 있을까?
그 때, 등 뒤에서 누군가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민준.”
그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다. 마치 바위가 말을 하는 것 같은 느낌.
민준은 몸을 돌렸다. 준호가 서 있었다.
3년이 흘렀다. 하지만 준호는 거의 변하지 않아 보였다. 아니, 더 정확히는 변한 것이 보이지 않았다. 마치 시간이 그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처럼. 검은 롱 코트를 입고 있었고, 얼굴은 수염이 자국이 남아 있었다. 눈은 여전히 어두웠다. 그것은 민준이 기억하는 그 눈이었다. 배우의 눈. 하지만 더 이상 희망이 없는 눈.
“형.”
민준이 인사했다.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준호는 말 없이 손을 들어 민준의 어깨를 쓸어내렸다. 그 손길은 부드러웠다. 하지만 뭔가 확인하는 듯한 느낌이 있었다. 마치 민준이 정말로 존재하는지 확인하는 것처럼.
“정말 오래됐다.”
준호가 말했다.
“형도 축하 메시지를 보냈어요?”
민준이 물었다.
“당연하지. 넷플릭스 주인공이 되었으니까. 한국 드라마의 신성(新星)이 되었으니까.”
준호의 목소리에는 뭔가 냉소적인 톤이 섞여 있었다. 마치 희극을 보고 있는 사람처럼.
“형, 축하 말고… 뭔가 다른 얘기를 하고 싶은 거 같은데.”
민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준호는 잠깐 침묵했다. 그 침묵은 길었다. 주변의 자동차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경적음, 엔진음, 타이어음. 모두가 겹쳐져서 낮은 으르렁거림을 만들었다. 마치 거대한 짐승이 숨을 쉬는 것처럼.
“걸으면서 말할까?”
준호가 말했다.
## 3부: 걷기와 침묵
그들은 걷기 시작했다. 테헤란로를 따라. 방향은 특별하지 않았다. 그냥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민준은 자신의 발걸음을 의식했다.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그 리듬은 규칙적이었다. 마치 시계의 초침처럼. 그리고 그 리듬은 준호의 발걸음과 맞아떨어졌다. 두 사람의 발이 거의 같은 속도로 움직였다.
주변의 사람들은 그들을 지나갔다. 아무도 이 두 남자를 특별하게 보지 않았다. 그저 거리를 걷는 평범한 남자들일 뿐이었다. 하지만 민준의 내부에는 뭔가 격렬한 것이 일어나고 있었다. 마치 폭풍이 그의 가슴 속에서 일고 있는 것처럼.
“민준아, 너는 지금 뭘 원해?”
준호가 갑자기 물었다. 여전히 앞을 보면서.
“뭘 원한다니요?”
“배우로서. 사람으로서. 뭘 원해?”
민준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몇 초를 생각했다.
“성공을 원하죠. 좋은 배역을 원하고. 상을 원하고. 관객들에게 인정받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그게 전부야?”
“뭐가 더 있어야 하는데요?”
“사람. 진짜 사람.”
준호가 그렇게 말했다.
“저는 지금 진짜인데요.”
“아니야. 넷플릭스 주인공이 된 순간부터, 넌 더 이상 진짜가 아니야. 넌 캐릭터가 돼. 그리고 그 캐릭터는 끊임없이 변할 거야. 관객들의 시선에 따라. 비평가들의 평가에 따라. 마케팅 전략에 따라.”
민준은 그 말을 들으면서 뭔가 불안해졌다. 준호의 목소리는 경험에서 나오는 목소리였다. 그것은 분명했다.
“형도… 그래서 배우를 그만둔 거예요?”
준호는 다시 한번 침묵했다. 그들은 계속 걸었다. 여전히 같은 속도로.
“나는 배우를 그만둔 게 아니야. 배우가 나를 그만뒀어. 3년 전에.”
“그게 무슨…”
“나는 배우로서 충분하지 않았어. 충분한 외모도 아니고, 충분한 재능도 아니고, 충분한 운도 없었어.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아무도 나를 원하지 않았어. 역할도 없고, 영화도 없고, 드라마도 없었어. 그냥… 사라졌어.”
준호의 목소리는 점점 낮아졌다. 마치 지하실로 내려가는 계단 같이.
“그런데 넌 달라. 넌 운이 있어. 충분한 운. 그리고 충분한 매력. 그리고 충분한… 가능성.”
민준은 그 말을 들으며 묘한 감정을 느꼈다. 축하인지, 경고인지, 아니면 질투인지. 모든 감정이 섞여 있는 것 같았다.
## 4부: 카페와 에스프레소
그들은 결국 카페에 들어갔다. 작은 카페였다. 테헤란로에 있는 수백 개의 카페 중 하나일 뿐이었다. 내부는 어두웠다. 회색 벽, 검은 의자, 밝지 않은 조명.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준호는 카운터에 가서 에스프레소를 주문했다.
“블랙으로.”
“아니면 설탕이나…”
“블랙으로.”
민준도 같은 것을 주문했다. 이유는 특별하지 않았다. 단지 형이 마시는 것과 같은 것을 마시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들은 카페의 한구석에 앉았다. 창가가 아닌 곳. 마치 세상으로부터 숨으려는 것처럼.
에스프레소 잔이 놓여졌다. 작은 하얀 잔에 짙은 갈색의 액체. 그리고 그 위에 떠 있는 황금색의 크레마.
민준은 그 커피를 들었다. 손가락이 약간 떨렸다. 온기가 손을 데웠다. 그것은 현실 같은 감각이었다. 적어도 이 커피는 진짜인 것 같았다.
“형이 지난밤에…”
민준이 다시 시작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정확히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몰랐다.
“지난밤?”
“전 기억이… 잘 안 나요. 형이 왔을 때 뭐가…”
준호는 민준의 눈을 직접 봤다. 그 눈빛에는 뭔가 불안정한 것이 있었다.
“민준아. 지금은 진짜 안 돼. 시간이 필요해.”
“시간? 형이 말했잖아요. 형이 나를 원한다고.”
“맞아. 그래서 더 위험해.”
준호가 말했다.
“뭐가 위험한데요?”
“너. 너를 잃는 거. 너를 완전히 잃기 전에.”
그 말의 의미는 명확하지 않았다. 하지만 민준의 몸은 이해하고 있었다. 가슴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호흡이 얕아지고 있었다.
“형…”
“마셔. 커피.”
준호가 그의 손을 잡았다. 따뜻한 손길이었다.
민준은 커피를 마셨다. 쓴맛이 입안에 퍼졌다. 그것은 거의 불쾌한 맛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진짜 맛이었다. 그것이 유일한 진짜인 것 같았다.
## 5부: 메시지들의 홍수
민준의 휴대폰이 울렸다.
진동음이 테이블 위에서 울려 퍼졌다. 그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이수진(매니저)의 전화였다.
“받아.”
준호가 말했다.
“지금요?”
“받아. 넌 이제 받아야 해. 모든 전화를. 모든 메시지를. 모든 요청을.”
민준은 전화를 받았다.
“네, 이수진 님.”
“민준! 지금 어디야?”
“카페에 있어요.”
“누구와?”
“친구와…”
“지금 당장 와야 해. 넷플릭스에서 긴급 회의를 했어. 너에 대한 마케팅 전략이 나왔어. 내일 오전 9시 회의가 있어.”
“내일요?”
“지금 당장 와. 2시간 후에 회의실에서 만나.”
전화가 끊겼다.
민준은 휴대폰을 내려놨다.
“너 가야 해.”
준호가 말했다.
“형… 우리 더 이야기하고…”
“시간이 없어. 이제 너에겐 시간이 없어. 넷플릭스 주인공에겐 시간은 사치야.”
준호는 일어났다.
“가. 그리고 기억해. 넌 더 이상 자유롭지 않아. 넌 이제 시스템의 일부야. 기계의 톱니바퀴야. 그리고 그 기계는 절대로 멈추지 않아.”
“형, 우리 다시…”
“알겠지?”
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들은 카페를 나갔다. 테헤란로의 저녁이 그들을 맞이했다. 거리는 더 어두워져 있었다. 네온사인들이 켜지기 시작했다. 빨강, 파랑, 초록. 모든 색깔이 섞여서 거리를 물들였다.
그리고 그 속에서 민준은 자신이 천천히 사라지고 있는 것을 느꼈다.
## 6부: 기계가 되어가는 과정
회사의 회의실은 무섭게 밝았다. 형광등 불빛이 모든 것을 드러냈다. 숨을 곳이 없었다. 민준은 긴 테이블의 한쪽 끝에 앉았다. 맞은편에는 넷플릭스의 마케팅 담당자들이 앉아 있었다. 모두 젊었다. 모두 웃고 있었다.
“민준 배우! 정말 환영합니다!”
“감사합니다.”
“우리가 준비한 전략을 보여드릴 텐데, 정말 혁신적이에요.”
화면이 켜졌다. 그 위에 나타난 것은 민준의 얼굴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이 아니었다. 그것은 캐릭터였다. 마케팅을 위해 조정된 이미지였다. 더 젊어 보이고, 더 매력적으로 보이고, 더 신비로워 보이는 이미지.
“이것은 당신의 이미지입니다. 우리가 만든 당신의 페르소나입니다. SNS에서 이 이미지를 유지해주시면 됩니다.”
“제가… 이 대로 해야 한다는 뜻이에요?”
“정확히는, 당신의 진짜 모습을 숨기고 이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뜻입니다.”
민준의 가슴이 철렁했다.
그 순간, 준호의 말이 떠올랐다.
*“넌 더 이상 자유롭지 않아. 넌 이제 시스템의 일부야. 기계의 톱니바퀴야.”*
회의는 계속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