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04화: 그림자의 손가락
침대에서 일어날 때, 민준의 무릎이 먼저 깨어났다. 마치 자신의 몸이 의식보다 먼저 현실을 받아들이려는 것처럼. 어제 밤의 준호, 그의 손이 자신의 가슴팍에 얹혔던 느낌이 아직도 남아있었다. 가슴팍이라는 것은 참 이상한 위치다. 심장도 있고, 호흡도 있고, 때론 울음도 터지는 그곳. 준호는 그곳을 눌렀던 것이 아니라, 마치 그곳이 어떤 신호를 발신하고 있는지를 확인하려는 것처럼.
민준은 침대 끝에 앉아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침대에서 내려온 게 아니라, 침대에서 아직도 부분적으로 연결된 상태로 앉아 있었다. 밤새 꿈을 꿨을까, 아니면 꿈을 꾸지 못한 채 천장의 곰팡이를 봤을까. 기억이 모호했다. 단지 준호가 떠난 후의 시간들이 물처럼 흘러갔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핸드폰이 울렸다.
화면을 봤다. 준호였다. 시간은 오전 9시 37분. 화면을 켠 후 10초 정도 바라봤다.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통화 버튼을 누르는 것이 마치 어떤 계약에 서명하는 것 같았다. 또 다른 무언가를 받아들이는 것처럼.
결국 손가락이 움직였다.
“네?”
민준이 말했다.
“지금 일어났어?”
준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의 목소리는 언제나 아침에 더 낮다. 마치 밤 동안 성대가 쉬었다가 다시 깨어나는 과정을 거치는 것처럼.
“네, 지금.”
민준이 거짓말했다. 거짓말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아니, 그것을 거짓말이라고 부르기도 이상했다. 단지 사실의 일부를 감춘 것일 뿐.
“피자 먹을래?”
준호가 물었다.
그 질문이 너무 갑작스러워서, 민준은 다시 한 번 핸드폰 화면을 봤다. 정말로 준호가 묻는 건가. 준호는 이렇게 즉흥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항상 계획적이고, 신중하고, 마치 다음 발걸음을 미리 계산해놓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피자를 먹을 것인지를 묻다니.
“예?”
민준이 되물었다.
“피자. 먹고 싶어?”
준호가 반복했다.
“언제요?”
“지금. 점심.”
“지금은… 아직 아침이잖아요.”
민준이 말했다.
“그래서 준비 시간이 있지. 30분 뒤에 만나자. 학교 근처 피자 가게.”
준호가 말했다. 그리고 학교 근처라는 표현이 이상했다. 민준은 학교에 다니지 않았다. 대신, 신림동의 한 대학교 근처에 살고 있었다. 그 근처 상가들이 학생들을 위한 저렴한 음식점들로 가득했다. 준호는 그곳을 “학교 근처”라고 부르고 있었다. 마치 자신도 거기를 여러 번 와봤다는 것처럼.
“알겠어요.”
민준이 대답했다.
통화가 끝났다. 민준은 30분 안에 씻고 나가야 했다. 반지하 원룸의 욕실은 샤워 시설만 있었고, 욕조는 없었다. 찬물로 5분. 뜨거운 물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2분. 그리고 실제로 씻는 시간이 8분. 합쳐서 15분이면 충분했다.
민준은 샤워를 하면서, 천장을 봤다. 욕실의 천장도 곰팡이가 피어있었다. 하지만 침실의 천장과는 다르게, 욕실의 곰팡이는 물기 때문에 더 활발하게 자라고 있었다.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호흡하듯이. 번식하듯이.
그리고 어떤 순간, 민준은 자신이 곰팡이와 같다고 생각했다. 이 반지하에서 습한 환경 속에서만 자라날 수 있는 어떤 것. 햇빛이 없는 곳에서만 살 수 있는 어떤 것. 이곳 밖으로 나가면 죽을지도 모르는 그런 것.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때, 시간은 9시 52분이었다. 8분밖에 남지 않았다. 옷을 입었다. 낡은 청바지와 회색 티셔츠. 이것들은 오디션에 갈 때 입는 옷이었다. 중립적인 옷. 어떤 캐릭터로도 변할 수 있는 옷. 어떤 인상도 남기지 않는 옷.
거울을 봤다. 자신의 얼굴이 거울 안에 있었다. 174센티미터의 몸에 달린 평범한 얼굴. 극도로 평범한. 어디서 봤는지 기억나지 않는 그런 얼굴. 그런데 그 얼굴의 눈이 뭔가 달라 보였다. 어제와는 다른 표정을 하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는 눈빛. 아니, 더 정확하게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눈빛.
학교 근처 피자 가게까지는 걸어서 8분이었다. 신림로를 따라 올라가면서, 민준은 주변을 자세히 봤다. 오전 10시의 신림동. 학생들이 오기 전의 시간. 상점 주인들이 가게를 정리하는 시간. 어제의 쓰레기를 치우고, 오늘의 상품을 진열하는 시간.
피자 가게는 “Napoli”라는 이름의 작은 가게였다. 이탈리아식 피자를 표방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한국식 피자였다. 치즈가 많고, 옥수수와 계란이 올려져 있고, 매운맛 옵션도 있었다. 민준은 이곳을 몇 번 와봤다. 아, 정확하게는 준호와 함께 온 것이다. 몇 번.
준호는 이미 와 있었다. 테이블에 앉아서 메뉴를 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피곤해 보였다. 어제 밤 자신의 집에 가서, 자신의 천장을 봤던 피곤함이 아직도 남아있었다.
민준이 앉자, 준호가 메뉴를 내렸다.
“뭘 먹을 거야?”
준호가 물었다.
“형이 시킨 거 따라서.”
민준이 말했다.
“이건 질문이 아니라 선택이야. 넌 뭘 먹고 싶어?”
준호가 다시 말했다.
이 질문이 이상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순히 음식에 대한 질문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준호는 민준에게 다른 무언가를 묻고 있었다. “넌 뭘 원해?” 같은. “넌 뭘 선택할 거야?” 같은.
민준은 잠깐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이 실제로 원하는 것이 뭔지를 깨달았다. 하지만 그것은 이 메뉴판에 없었다.
“매운 거요. 가장 매운 거.”
민준이 말했다.
“왜?”
“모르겠어요. 그냥 오늘은.”
민준이 말했다.
준호는 웃음이 나올 뻔했다. 하지만 웃지 않았다. 대신 그는 웨이터를 부르고, 매운 피자 두 판을 시켰다.
음식이 나오는 동안, 둘은 말을 하지 않았다. 침묵이 테이블을 덮었다. 하지만 그것은 불편한 침묵이 아니었다. 마치 두 사람이 같은 음악을 듣고 있는 것처럼. 둘만의 음악을. 다른 사람들은 들을 수 없는.
피자가 나왔을 때, 김이 피어올랐다. 치즈가 녹아있었고, 매운 소스가 붉게 칠해져 있었다. 민준은 첫 입을 깨물었다. 매움이 혀를 자극했다. 침샘이 반응했다. 눈물이 나올 뻔했다. 하지만 나오지 않았다.
준호도 먹고 있었다. 그의 먹는 방식은 차분했다. 마치 음식을 분석하고 있는 것처럼.
“어제 밤에 내가 뭘 했는지 알아?”
준호가 물었다. 입을 다물고 있으면서. 피자를 씹으면서.
“뭘요?”
민준이 물었다.
“너를 떠난 후에.”
준호가 말했다.
“모르겠어요.”
“차를 타고 한 시간을 운전했어. 서울 전역을 돌아다녔어. 강남에서 강북으로. 한강을 몇 번을 건넜어. 한강 다리 위에서 멈춰서 강물을 봤어.”
준호가 계속했다.
“뭘 생각했어요?”
민준이 물었다.
“너를. 넌 저 강물 같은 거야. 자꾸 움직이려고 하지만, 결국 같은 곳으로 흘러가려고 하는.”
준호가 말했다.
민준은 그 비유를 이해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니, 이해가 되지만 동시에 수용할 수 없었다. 자신이 강물이라니. 자신이 목표지점으로 흘러가는 어떤 것이라니. 자신이 통제 불능의 무언가라니.
“형은 왜 그걸 말해요?”
민준이 물었다.
“왜냐하면 넌 자신이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모르니까. 넌 자신이 정지해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넌 계속 움직이고 있어.”
준호가 말했다.
그 말이 맞는지 틀린지는 민준도 몰랐다. 단지 그것이 깊이 박혔다. 준호의 말들은 항상 그랬다. 마치 돌을 물에 던지는 것처럼. 그 돌이 만드는 파문이 한참을 퍼져나가는 것처럼.
피자를 먹으면서, 민준은 사람들을 관찰했다. 카페 내의 다른 테이블들. 노트북을 켜놓고 공부하는 학생들. 스마트폰을 보면서 한 입씩 집어먹는 직장인. 친구들끼리 웃으면서 먹는 젊은이들. 모두가 자신의 삶을 살고 있었다. 모두가 어딘가로 흘러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랑 영화 보러 갈래?”
준호가 갑자기 물었다.
“언제요?”
“오늘. 저녁.”
“영화요?”
민준이 되물었다.
“넷플릭스 영화. 아직 개봉 안 한 거. 시사회.”
준호가 말했다.
민준의 심장이 한 박자를 멈췄다. 시사회. 그것은 보통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배우들, 감독들, 그리고 영화계의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다. 준호가 자신을 그런 곳으로 데려가겠다는 것인가.
“왜요?”
민준이 물었다.
“왜냐하면 넌 그곳에 가야 해. 너는 이 반지하에서만 영화를 봐야 하는 게 아니라, 현장에서 봐야 해. 그곳의 공기를 마셔봐야 해. 그곳의 사람들을 봐야 해.”
준호가 말했다.
민준은 답할 수 없었다.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오후가 되자, 준호가 문자를 보냈다.
“6시에 서울극장 앞에서 만나자. 반바지와 구두는 입지 마. 정장을 입어.”
정장. 민준은 정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의 옷장에는 낡은 청바지와 티셔츠들만 있었다. 그리고 몇 장의 흰 셔츠. 아, 그리고 고등학교 졸업식 때 입었던 검은 양복. 그것은 10년 전의 옷이었다.
민준은 신림동 상가로 나갔다. 시간은 오후 2시였다. 영화 시사회까지는 4시간이 남아있었다. 옷을 사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돈은 없었다.
신용카드를 꺼냈다. 한도는 500만 원. 사용한 금액은 420만 원. 남은 금액은 80만 원. 정장 한 벌이라면 충분했다.
신림동의 작은 남성복 가게에 들어갔다. 주인은 50대 여성이었다. 그녀는 민준을 한 번 보고, 그의 몸 크기를 대략 파악했다. 마치 그런 일을 수십 년을 해온 것처럼.
“행사 있어?”
주인이 물었다.
“영화 시사회요.”
민준이 대답했다.
“배우?”
“아뇨. 그냥…”
민준이 말했다.
“될 거 같은데. 너 얼굴 봐. 영화배우 얼굴이야.”
주인이 말했다.
그 말이 민준을 놀라게 했다. 자신의 얼굴이 영화배우 같다니. 자신은 항상 반대라고 생각했는데. 자신의 얼굴은 극도로 평범하다고. 극도로 기억되지 않는다고.
주인은 몇 벌의 정장을 가져왔다. 검은색, 진한 회색, 남색. 민준은 세 벌을 모두 입어봤다. 거울 앞에서. 그리고 깨달았다. 옷이 바뀌면 사람도 바뀐다는 것을. 마치 다른 사람이 되는 것처럼.
결국 검은색 정장을 샀다. 가격은 75만 원. 신용카드로 긁었다. 카드 한도는 이제 5만 원만 남았다.
가게를 나오면서, 주인이 뒷모습을 봤다.
“화이팅.”
주인이 말했다.
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한 마디가 자신을 얼마나 강하게 만드는지를 느꼈다.
오후 5시 45분, 민준은 서울극장 앞에 서 있었다. 검은 정장을 입고. 새로 사온 구두를 신고. 하지만 여전히 자신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이 손이 정장 안에 숨겨져 있었지만, 떨림은 계속되고 있었다.
준호가 나타났다. 그도 정장을 입고 있었다. 검은색 정장과 하늘색 넥타이. 배우다운 멋이 있었다. 45세에 가까운 남자가 이렇게 우아할 수 있다니.
“좋아 보여.”
준호가 말했다. 민준을 한 번 보고.
“감사합니다.”
민준이 말했다.
“이제부터 나를 따라. 여기서는 넌 내 후배야. 나는 너를 소개할 거야. 넌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마주치고, 웃기만 하면 돼.”
준호가 말했다.
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깨달았다. 자신이 지금 연기를 시작했다는 것을. 자신의 이 삶이 하나의 긴 연기라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 왜냐하면 연기라면, 거짓이라면, 자신은 버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준호와 함께 극장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민준은 처음으로 이 세계의 다른 면을 보게 되었다.
시사회장의 문이 닫혔을 때, 민준은 자신의 손이 여전히 떨리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것이 두려움이 아니었다. 그것은 기대였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변화의 신호였다. 마치 나비가 번데기를 깨고 나가려고 할 때의 그런 떨림.
영화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스크린 위에 나타난 첫 번째 장면은, 한 배우가 그림자 속에서 걸어나오는 장면이었다. 그 배우의 얼굴은 완전히 드러나지 않았다. 단지 그 배우의 손가락이 스크린 가장자리에 보였다.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는 손가락들. 마치 그림자 그 자체인 것처럼.
민준은 그 손가락을 봤다. 그리고 자신의 손가락과 비교했다. 자신의 손도 그렇게 무표정할 수 있을까. 자신의 손도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자신의 손도 그렇게 거짓말할 수 있을까.
그 순간, 준호가 민준의 손을 잡았다. 아주 살짝.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마치 그림자의 손가락이 다른 그림자의 손가락을 잡는 것처럼.
민준은 준호를 봤다. 하지만 준호는 스크린을 계속 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빛과 어둠 사이에 있었다. 마치 영화 속 배우처럼. 마치 자신도 이 거대한 무대 위에 있는 것처럼.
그리고 민준은 깨달았다. 자신이 처음으로 누군가의 손을 꽉 잡고 있다는 것을. 그 손이 자신을 어디로 데려갈 것인지는 몰라도, 적어도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그것이 충분했다. 아니, 그것이 모든 것이었다.
영화는 계속되었다. 그리고 민준은 더 이상 자신의 손이 떨리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았다.
# 그림자의 손가락
## 1부: 준비
오후 3시 30분, 민준은 자신의 셋방 앞에 서 있었다. 좁은 복도, 희미한 형광등, 그리고 벽지 한 귀퉁이에서 살짝 들뜬 노란 페인트. 이것이 자신의 전부였다. 한 달에 45만 원, 관리비 3만 원. 대학교 4학년이 벌 수 있는 최대한의 대가였다.
손잡이를 돌렸다. 문이 열렸다. 방 안은 여전했다. 침대, 책상, 그리고 책장. 책장에는 연기 교과서들이 빼곡했다. <스탠리스키 연기법>, <메이스너 테크닉>, <감정 기억법>. 모두 중고로 구매한 것들이었다. 페이지마다 형광펜으로 줄을 그었고, 여백에는 자신의 손글씨가 가득했다.
“이번엔 달라야 해. 이번엔…”
혼잣말을 했다. 목소리가 떨렸다. 늘 그랬다. 긴장하면 목소리가 먼저 떨렸다. 그 다음이 손이었다. 그 다음이 무릎이었다. 마치 떨림이 신체를 통해 아래로 내려가는 지진파처럼.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는 ‘주인’ 이라는 이름이 떴다. 주인은 자신이 다니는 영화배우 학원의 원장이었다. 55세, 오래전 드라마에서 조연으로 출연했던 경력이 있는 사람. 이제는 후진을 양성하는 것으로 보람을 찾는다고 자주 말했다.
“민준아.”
주인의 목소리는 항상 차분했다. 마치 물이 흐르는 소리처럼. 급하지도 않고,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네, 주인님.”
“시사회 초대가 들어왔어. 준호 선배를 통해서. 넌 어때? 준비가 되어 있어?”
준호. 그 이름만으로도 마음이 철렁했다. 준호는 실제로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하는 배우였다. 자신이 다니는 학원의 선배였고, 주인의 제자 중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이었다. 45세에 가까웠지만, 영화배우로서의 위상은 여전했다. 최근에는 독립영화로 주목을 받고 있다는 소문도 있었다.
“네… 가고 싶습니다.”
자신의 대답을 듣고 있자니, 그 말이 어떻게 들릴지 궁금했다. 너무 간절해 보일까? 너무 약해 보일까?
“좋아. 그런데 민준아, 너는 아직 모르겠지만, 이런 자리는 단순한 영화 관람이 아니야. 이건 하나의 네트워크야. 인맥이야. 그리고 동시에… 하나의 무대야.”
주인의 말이 계속되었다. 자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화기 너머에 있는 주인은 자신의 고개를 볼 수 없었지만, 그래도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그것이 일종의 의식인 것처럼.
“시사회장에 가면, 배우들도 있고, 영화감독들도 있고, 프로듀서들도 있을 거야.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관찰해. 무조건적으로. 본능적으로. 마치 사냥꾼이 먹이를 관찰하는 것처럼. 그들은 너의 제스처를 볼 거야. 너의 표정을 볼 거야. 너의 목소리의 톤을 들을 거야. 그리고 그 모든 것이 하나의 연기가 되어야 해. 무엇의 연기냐면… 자신감의 연기야.”
“자신감의 연기요?”
“그래. 너는 자신감이 없지. 알아. 보이니까. 하지만 그것을 보여주면 안 돼. 너는 마치 자신감이 있는 사람처럼 행동해야 해. 그리고 신기한 건, 그렇게 연기하다 보면, 정말로 자신감이 생긴다는 거야. 그건 내 경험이야. 그리고 모든 배우들의 경험이야.”
주인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어떤 강한 확신이 있었다. 마치 물이 흐르지만, 그 물이 바위를 깨뜨리는 힘을 가진 것처럼.
“그리고 민준아, 가장 중요한 것 하나를 더 말해 줄게. 시사회장에 가면, 넌 배우들을 볼 거야. 그들은 완벽해 보일 거야. 마치 신처럼. 하지만 그들도 처음엔 너처럼 떨렸어. 너처럼 두려워했어. 그들이 지금 그렇게 보이는 건, 그들이 완벽해서가 아니야. 그들이 충분히 거짓을 잘 지었기 때문이야. 그리고 그 거짓을 반복했기 때문이야. 그래서 그것이 진실처럼 보이는 거야.”
민준은 그 말을 받아 적었다. 노트에. 손으로 직접 적었다. 손이 떨렸지만, 그래도 적었다.
“그리고 민준아, 하나만 더. 시사회에서는 준호가 너를 소개할 거야. 그때 넌 그냥 그의 후배처럼 행동하면 돼. 너는 아직 배우가 아니니까. 하지만 넌 미래의 배우처럼 행동해야 해. 그 차이가 느껴지니?”
“네, 주인님.”
“좋아. 그런데 민준아, 가장 중요한 것을 잊지 마. 이 모든 것이 연기라고 생각해. 그러면 두렵지 않아. 왜냐하면 연기는 거짓이고, 거짓은 버틸 수 있으니까. 진실은 버티기 힘들어. 하지만 거짓이라면… 거짓이라면 충분히 버틸 수 있어.”
전화가 끊어졌다. 민준은 여전히 휴대폰을 귀에 붙이고 있었다. 통화 종료 음성이 반복되었지만, 그래도 귀에 붙이고 있었다.
## 2부: 준비의식
오후 4시 15분, 민준은 옷장 앞에 서 있었다. 옷장 안에는 별로 많은 옷이 없었다. 학교 다닐 때 입는 평상복들, 그리고 몇 벌의 셔츠. 그 중에서 검은색 정장을 꺼냈다. 작년 겨울에 구매한 것이었다. 당시에는 면접을 위해 샀었다. 대학교 4학년 학생으로서 할 수 있는 마지막의 노력이었다. 면접은 떨어졌지만, 정장은 남았다.
옷을 입으면서, 거울을 봤다. 거울 속의 자신은 여전했다. 21살, 마른 체형, 그리고 불안한 눈빛. 영화배우가 될 수 있을까? 이 얼굴로? 이 체형으로? 이 눈빛으로?
셔츠를 입었다. 흰색 셔츠였다. 정장 안에 숨겨질 셔츠. 그래도 정장 안에 입는 옷도 신경 쓸 필요가 있다고, 주인이 말했었다. “왜냐하면 그것이 너의 자신감을 만들어주기 때문이야. 다른 사람이 못 봐도, 넌 안다. 내가 제대로 입었다는 것을.”
정장을 입으면서, 민준은 자신이 변하는 것을 느꼈다. 옷이 몸을 감싸면서, 뭔가 다른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 마치 배우가 분장실에서 분장을 하면서 다른 캐릭터가 되는 것처럼.
신발장을 열었다. 그 안에는 낡은 운동화 한 켤레와, 새 구두 한 켤레가 있었다. 새 구두는 사흘 전에 구매한 것이었다. 11만 원을 주고 산 것이었다. 그 돈은 두 주일 동안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것이었다.
구두를 신으면서, 민준은 자신의 발걸음이 어떻게 변했는지 느꼈다. 평상복에 운동화를 신었을 때의 걸음과는 다른 걸음. 마치 누군가를 따라가야 할 때의 그런 걸음. 아니, 누군가가 자신을 따라가기를 원할 때의 그런 걸음.
거울 앞에 다시 섰다. 이번에는 조금 달라 보였다. 정장 안의 셔츠는 보이지 않았지만, 자신은 그것이 깨끗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새 구두는 살짝 불편했지만, 그 불편함이 자신을 깨어있게 만들었다.
손을 들어올렸다. 손가락들이 떨리고 있었다. 여전했다. 옷이 자신감을 만들어 주었지만, 손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이 손이… 정말로 그 손이 될 수 있을까? 영화 속에서 본 배우들처럼, 무표정하게 이야기하는 그런 손이?”*
거울 속의 자신은 대답하지 않았다. 거울은 단지 자신의 모습을 반사할 뿐이었다.
휴대폰을 들었다. 4시 35분이었다. 오후 5시 45분까지 1시간 10분이 남았다. 서울극장까지는 지하철로 30분이 걸렸다. 그러면 1시간 전에 떠나면 충분했다. 하지만 조금 일찍 나갈까. 극장 근처에서 시간을 보낼까. 아니, 너무 일찍 나가면 초조해 보일까.
민준은 침대에 앉았다. 정장 안주머니에는 휴대폰과 지갑만 있었다. 다른 것은 필요 없었다. 이 자리에는 자신이 필요한 것은 자신뿐이었다. 자신의 몸, 자신의 얼굴, 자신의 목소리, 그리고 자신의 거짓된 자신감.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5시 5분, 민준은 방을 나갔다.
## 3부: 여행
지하철 1호선, 민준은 창문에 비친 자신을 봤다. 정장을 입은 자신. 하지만 창문은 거울이 아니었다. 뒤에 있는 것들도 함께 비쳤다. 다른 승객들. 그들은 자신을 보고 있지 않았다. 자신은 아무도 아닌 사람이었다.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게 맞나? 이게 정말로 자신감이 있는 척하는 거야? 아무도 날 보지 않는데, 내가 무엇을 해야 하지?”*
민준은 자신의 손을 봤다.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손가락을 펼쳤다. 오므렸다. 펼쳤다. 오므렸다. 마치 심호흡을 하는 것처럼.
“명동역입니다.”
안내 음성이 울렸다. 민준은 일어났다. 다른 승객들과 함께 내렸다. 그들 사이에서 자신은 정말로 작아 보였다. 그들은 모두 자신감 있어 보였다. 혹은 그렇게 보이고 싶어서, 그렇게 행동하고 있었다.
서울극장까지는 걸어서 10분이었다. 민준은 천천히 걸었다. 구두가 아직도 불편했지만, 그 불편함이 자신을 깨어있게 만들었다. 마치 깨어있는 것이 중요한 순간처럼.
거리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5시 40분, 퇴근 시간이었다. 모두가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자신은 어디로 향하고 있을까? 자신의 미래로? 아니면 자신의 거짓으로?
서울극장이 보였다. 건물 앞에는 영화 포스터들이 붙어있었다. 다양한 영화들. 그 중에서 자신이 보게 될 영화의 포스터는 작은 구석에 있었다. <그림자>. 제목만 봐도 어두웠다. 포스터 이미지는 한 사람의 실루엣이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단지 검은 형태만 있었다.
극장 앞의 벤치에 앉았다. 5시 42분. 아직 3분이 남았다. 민준은 자신의 손을 봤다.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을 숨길 필요가 없었다. 곧 준호를 만날 것이었다. 그 순간부터는 모든 것이 연기가 되어야 했다. 손의 떨림도, 호흡도, 눈의 떨림도 모두.
*“준호는 어떨까? 준호는 떨렸을까? 아니겠지. 준호는 배우니까. 준호는 이미 충분히 연기를 했으니까. 준호는 더 이상 떨리지 않을 거야.”*
그 순간, 누군가가 자신의 옆에 섰다.
“민준이?”
민준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 4부: 만남
준호는 생각했던 대로 아름다웠다. 검은색 정장, 하늘색 넥타이, 그리고 45세에 가까운 얼굴에 있는 확신. 그 확신은 주름으로도 표현되었다. 눈가의 주름, 입가의 주름. 모두가 경험을 말하고 있었다.
“네, 준호님.”
민준은 일어났다. 그리고 일어나면서, 자신의 손이 더 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을 보여주면 안 된다고, 주인이 말했었다.
“좋아 보여.”
준호가 말했다. 민준을 한 번 보고. 그의 눈에는 평가의 빛이 있었다. 마치 어떤 미술 작품을 보는 미술관장처럼.
“감사합니다.”
민준이 말했다. 목소리가 떨렸다. 하지만 표정은 떨리지 않았다. 얼굴 근육을 조절했다. 주인에게서 배운 기술을 사용했다. 이마에서부터 아래로, 눈썹에서부터 입 끝까지. 모든 근육을 의식적으로 조절했다.
“이제부터 나를 따라. 여기서는 넌 내 후배야. 나는 너를 소개할 거야. 넌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마주치고, 웃기만 하면 돼. 그리고 너무 많이 말하지 마. 말을 많이 하면, 거짓이 들릴 수 있어. 침묵은 신비로움을 만들어. 그리고 신비로움은 매력이야.”
준호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주인의 목소리와 비슷했다. 차분하고, 흐르는 물처럼. 하지만 그 안에는 더 깊은 경험이 있었다. 마치 물이 더 깊어지면서, 더 차가워지는 것처럼.
“네, 감사합니다.”
민준이 말했다.
“그리고 민준아, 하나 더. 너는 지금 연기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 이 모든 것이 무대야. 극장 안만 무대가 아니야. 시사회장도 무대야. 아니, 이 거리도 무대야. 너는 지금 모두에게 보이고 있어. 비록 아무도 너를 보려고 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너는 보이고 있어. 그리고 그것이 배우의 운명이야.”
준호가 말했다. 그리고 그 순간, 민준은 깨달았다. 자신이 지금 연기를 시작했다는 것을. 자신의 이 삶이 하나의 긴 연기라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 왜냐하면 연기라면, 거짓이라면, 자신은 버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알겠습니다.”
민준이 말했다. 이번에는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 비록 손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지만.
준호와 함께 극장으로 들어갔다. 자동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가면서, 민준은 자신이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밖은 따뜻했지만, 극장 안은 차가웠다. 밖은 밝았지만, 극장 안은 어두웠다. 마치 영화 속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처럼.
극장 로비에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