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화: 조연의 운명
민준은 거울을 마주하고 있었다. 라커룸의 형광등 빛 아래, 그의 얼굴은 극도로 평범했다. 174cm의 마른 몸, 밝은 갈색 눈, 자연스러운 검은 머리—누군가는 이것을 “무해함”이라고 부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민준은 이것을 “잊혀짐”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또 떨어졌다.
거울 속 자신의 입가가 움직였다. 웃음인지 경련인지 구분할 수 없는 표정. 그는 천천히 로커를 열었다. 안에는 검은 티셔츠, 회색 바지, 낡은 운동화, 그리고 3년 전 입사 때 받은 회사 명함이 들어있었다. 명함의 글자는 이미 까맣게 바래있었다.
더스타 엔터테인먼트. 배우 민준.
2023년 11월, 서울 강남. 더스타 엔터테인먼트의 라커룸은 오후 3시 50분이라는 시간이 무색하게 조용했다. 촬영 현장에서 돌아온 배우들은 대부분 자신의 차로 빠져나갔고, 남은 것은 민준과 몇 명의 신인들뿐이었다. 벽의 시계는 끊임없이 시간을 재고 있었다. 똑, 똑, 똑. 그 소리는 마치 심장의 고동처럼 들렸다.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민준은 번호를 확인했다. 카카오톡 알림이었다. 그는 화면을 켰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화면의 글자가 떨렸다. 아니, 화면이 떨린 게 아니라 그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김준호 배우님]: 민준아, 시간 되니? 혼자 카페 한 잔 할까?
민준은 한 손으로 휴대폰을 들고, 다른 손으로는 로커 문을 닫았다. 그 동작이 자동으로 나왔다. 4년간의 습관. 카톡 창을 닫고, 다시 열고, 닫고, 다시 열었다. 준호. 그 이름만으로도 민준의 가슴이 철렁거렸다.
김준호는 더스타의 준 스타급 배우였다. 8년 경력, 드라마의 2번 주인공을 자주 맡는 배우. 최근 극영화로 배우상 후보에도 올랐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유일하게 민준에게 친절한 선배라는 것이었다.
민준은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이 움직였다. 좌우로, 위아래로. 마치 문제의 정답을 찾는 학생처럼. 하지만 그는 이미 정답을 알고 있었다. 준호는 항상 좋은 뉴스를 들고 올 때 이렇게 친근하게 물었다. 혹은 나쁜 뉴스를 전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차이는 없었다. 차이가 없다는 것이 가장 끔찍했다.
[민준]: 넵. 지금 라커룸에서 나가고 있습니다.
빠른 손가락 움직임. 마지막 글자에 마침표를 붙였다. 항상 경어. 항상 조심. 마치 자신이 위태로운 계곡의 돌 위에 서 있는 것처럼.
라커룸을 빠져나가며 민준은 거울을 다시 봤다. 거울 속의 자신은 여전히 평범했다. 하지만 이제 그의 눈은 다른 무언가를 비추고 있었다. 불안. 그것은 마치 물 위의 파문처럼 눈의 표면을 흔들고 있었다.
카페는 강남역 부근에 있었다. 세련된 인테리어, 어딘가 높아 보이는 천장, 그리고 가격이 너무 비싼 아메리카노. 민준은 계단을 내려가며 준호를 찾았다. 창가 자리. 항상 같은 자리. 준호는 이미 커피 두 잔을 앞에 두고 앉아있었다.
“민준이, 앉아.”
준호의 목소리는 낮았다. 차분했다. 하지만 그 안에는 뭔가 떨리는 것 같았다. 아니, 민준의 귀가 그렇게 해석하고 있었다.
민준은 자리에 앉았다. 그의 움직임은 조심스러웠다. 마치 유리잔을 다루는 것처럼. 준호는 잠시 말을 끝내고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서울의 11월은 이미 겨울의 문턱에 들어서 있었다. 나뭇잎들이 갈색으로 변해가고 있었고, 사람들의 목에는 스카프가 감겨있었다.
“이번 오디션 결과 나왔어?”
준호의 질문은 뜬금없이 나왔다. 그는 여전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민준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네.”
민준의 목소리는 더 낮아졌다.
“어땠어?”
“떨어졌습니다.”
그 순간 준호가 돌아섰다. 그의 눈이 민준을 마주쳤다. 그 눈은 깊었다. 마치 오래된 우물처럼. 민준은 그 눈 안에 자신의 모습을 봤다. 작고, 외로운, 그리고 결정적으로 평범한 모습.
“몇 개야?”
“이번 달에 다섯 개요. 이번 해로는… 스물 세 개입니다.”
민준은 숫자를 말하면서도 자신이 말하는 것 같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 다른 사람이 자신의 입을 움직이고 있는 느낌. 준호는 한숨을 쉬었다. 그것은 동정의 한숨이 아니었다. 민준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이해의 한숨이었다.
“넷플릭스 드라마는?”
“그것도 떨어졌습니다.”
“어?”
이번엔 준호의 목소리가 올라갔다. 그는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민준은 자신의 커피 잔을 들었다. 아직 뜨거웠다. 입술이 그을렸다.
“촬영이 끝나고 두 주 전에 PD님께서 연락을 주셨어요. 다른 배우로 가기로 결정했다고.”
“왜 갑자기?”
“이유는… 말씀해주지 않으셨어요.”
민준은 커피를 다시 내려놨다. 잔과 소서가 충돌했을 때의 소리는 아주 작았다. 하지만 카페의 배경음악(재즈 피아노)과는 다르게 명확했다. 그것은 실패의 소리였다.
준호는 다시 창밖을 바라봤다. 그의 턱이 조여들었다. 민준은 그것을 봤다. 아주 미세한 움직임이었지만, 민준의 눈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 드라마… 꽤 좋은 작품이었는데.”
“네.”
“넷플릭스니까 해외 공개도 되고…”
“네.”
민준은 더 이상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조건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준호도 알고 있었다. 둘 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제 할 말이 없었다.
카페의 배경음악이 바뀌었다. 피아노에서 현악기로. 마치 장면 전환을 알리는 신호처럼. 준호는 커피를 마셨다. 그의 목이 움직였다. 한 모금, 두 모금. 그 사이에 몇 초가 흘렀다.
“내가 너한테 뭘 말해줄 수 있을까?”
준호의 질문은 자문처럼 들렸다.
“선배님은…”
민준이 입을 열었다.
“…이 정도면 잘하는 거 아닌가요?”
그 말이 끝나자마자 민준은 자신이 한 말을 후회했다. 아니, 후회라기보다는 수치심이 몰려왔다. 자신의 목소리가 얼마나 약했는지 알고 있었다. 그것은 질문이 아니라 울음소리였다.
준호는 커피 잔을 내려놨다. 그의 손가락이 잔의 테두리를 따라 움직였다. 반복적으로, 천천히.
“민준아, 너는 왜 배우를 하고 싶어?”
“어?”
민준은 그 질문이 예상 밖이었다. 준호는 이미 몇 번이나 같은 질문을 던진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다른 무언가가 담겨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민준은 알 수 없었다.
“정말 궁금해서. 너는 왜 배우를 하려고? 다른 일을 할 수도 있잖아. 회사원, 공무원, 뭐든지. 왜 이 일을?”
민준은 준호를 바라봤다. 준호의 눈은 여전히 깊었다. 하지만 이제 그 안에는 뭔가 다른 것이 보였다. 외로움. 아니, 더 정확하게는 자신과 같은 종류의 외로움. 그것은 오래된 것이었다. 마치 10년을 그 우물 안에서 살아온 듯한 외로움.
“모르겠어요. 정말 모르겠어요.”
민준의 목소리는 이제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다.
“어릴 때부터 영화를 봤어요. 그리고 배우들을 봤어요. 누군가를 표현하는 사람들을. 그것이… 좋았어요. 누군가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게. 자신이 아닌 다른 것이 될 수 있다는 게.”
준호는 민준의 말을 들으면서 천천히 눈을 감았다.
“자신이 아닌 다른 것이 될 수 있다는 게, 그래서 좋았어?”
“네.”
“그게 지금도 좋아?”
민준은 대답할 수 없었다. 그는 입을 다물었다. 그의 입술이 일직선을 이루었다. 그것은 대답보다 더 큰 대답이었다.
준호는 눈을 떴다. 그리고 민준을 바라봤다.
“내가 너한테 해줄 수 있는 조언이 있다면… 그건 아마도 이것일 거야. 이 업계에서는 두 가지만 있어. 성공한 배우와 버려진 배우. 그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어. 회색지대가 없다는 뜻이야.”
“네.”
“그리고 넌 지금… 빨간 불 앞에 서있어. 4년을 엑스트라와 조연으로 버텼어. 근데 이게 계속되면… 넌 버려진 배우가 돼. 사람들은 너를 잊을 거야. 마치 그 드라마처럼.”
민준의 손가락이 테이블 위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드럼을 치듯 리듬을 만들고 있었다. 그것은 신경증적이었다. 자신이 하는 행동이지만, 자신이 멈출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럼… 뭘 해야 하나요?”
“기회를 잡아야 해. 정말 큰 기회를. 단 하나의 역할이 너를 바꿀 수 있어. 주연 역할이 아니어도 괜찮아. 하지만 사람들이 잊지 못할 그런 역할. 그것만이 너를 살릴 수 있어.”
준호는 커피를 마저 마셨다. 잔이 비었을 때, 그것은 작은 음향을 냈다. 텅 빈 소리. 그것이 지금 민준의 마음 상태를 완벽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언제까지?”
“한 달? 두 달? 모르겠어. 업계는 빠르니까. 넌 빨리 움직여야 해. 아니면…”
준호는 말을 끝내지 않았다. 하지만 민준은 알고 있었다. “아니면”의 뒤에는 무엇이 올지. 그것은 자신의 아버지처럼 무언가를 포기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죽음과 같은 무언가였다.
카페를 빠져나갈 때, 민준은 이미 어두워진 서울의 거리를 걸었다. 11월의 저녁 공기는 차가웠다. 그의 숨이 희게 피어올랐다. 마치 자신의 몸 안에 뭔가가 피어나가고 있는 것처럼. 그것은 절망이 아니었다. 절망은 이미 익숙한 감정이었다. 이것은 다른 것이었다. 마치 절망이 한 단계 더 진화한 것 같은… 무언가.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알 수 없는 번호였다.
민준은 한 손으로 휴대폰을 들었다. 찬 공기 속에서 그의 손가락이 떨렸다.
“여보세요?”
“아, 민 배우님? 더스타 엔터 이수진 대표입니다. 시간 괜찮으세요?”
민준의 심장이 멈췄다. 아니, 멈춘 게 아니라 극도로 빨라졌다. 마치 심장이 폭발할 것처럼. 그의 목소리는 나왔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목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네, 대표님. 괜찮습니다.”
“좋아. 내일 오전 10시에 사무실로 와 줄 수 있어?”
“네.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민 배우, 한 가지 더.”
“네?”
“내일은 뭘 입어도 괜찮으니까, 그냥 편한 복장으로 와. 알겠어?”
통화가 끝났다.
민준은 휴대폰을 내려놨다. 그의 손이 떨렸다. 서울의 밤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를 스쳐지나갔다. 누구도 그가 누구인지 몰랐다. 하지만 그것이 지금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내일이었다. 내일 아침 10시. 더스타의 사무실. 이수진 대표.
그것은 준호가 말한 “기회”였을까? 아니면 “끝”을 알리는 신호였을까?
민준은 걷기 시작했다. 목표 없이, 방향 없이. 다만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그의 발 아래에서 낙엽이 부스러졌다. 그 소리는 마치 누군가의 마지막 숨소리처럼 들렸다.
그 밤, 민준은 자신의 오피스텔에 돌아갔다. 14평 반의 조그만한 공간. 침대, 책상, 냉장고, 그리고 창문. 그것이 전부였다. 그는 침대에 누웠다. 천장을 바라봤다. 천장은 백색이었다.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았다.
한 달? 두 달?
준호의 말이 반복되었다.
기회를 잡아야 해. 정말 큰 기회를.
민준은 휴대폰을 집었다. 인스타그램을 켰다. 자신의 팔로워는 312명이었다. 대부분은 친구들이거나 회사 동료들이었다. 연예인은 아니었다. 그는 지난 4년 동안 한 번도 “유명해지지” 않았다. 그는 단지 “일을 했을 뿐”이었다.
그는 준호의 인스타그램을 찾았다. 팔로워는 47만 명이었다. 최근 게시물은 영화제 레드카펫 사진이었다. 준호는 옷을 잘 입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은 피곤해 보였다. 마치 누군가를 찾고 있는 것처럼. 아니,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처럼.
민준은 휴대폰을 내려놨다.
천장을 다시 바라봤다. 백색의 천장은 여전히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가장 정직한 것 같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정직한 것은 침묵이었다.
그리고 내일이 올 것이었다.
내일 아침, 더스타의 사무실에서 무언가가 시작될 것이었다. 혹은 끝날 것이었다. 민준은 그것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불확실성 속에서, 그의 심장은 여전히 뛰고 있었다. 살아있다는 증거처럼, 끝나지 않았다는 증거처럼.
마치 배우처럼, 그는 내일의 무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침이 왔다.
민준은 5시에 깼다. 밤이 아직 완전히 가지 않았을 때.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 샤워를 했다. 따뜻한 물이 그의 몸을 적셨다. 거울 앞에서 그는 자신의 얼굴을 봤다. 여전히 평범했다. 하지만 이제 눈 아래에는 가벼운 다크서클이 생겨있었다. 불면의 밤의 증거.
그는 옷을 입었다. 검은 티셔츠, 회색 바지, 낡은 운동화. 준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편한 복장으로 와.”
오전 9시 40분. 민준은 더스타 빌딩 앞에 서 있었다. 강남의 빌딩은 높았다. 마치 자신의 꿈을 압도하려는 듯. 그는 문으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를 탔다. 15층. 그것은 이수진 대표의 사무실이 있는 층이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을 때, 민준은 한 명의 여자를 봤다. 25살 정도로 보이는 여자. 검은 머리를 묶고 있었다. 뮤지컬 배우처럼 보이는… 여자.
그리고 그 여자도 그를 보고 있었다.
그 순간, 무언가가 시작되었다. 민준은 아직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하지만 그것이 중요한 무언가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어? 엘리베이터?”
여자가 말했다.
“네.”
민준이 대답했다.
그리고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혔다.
제1화 끝
# 제1화: 백색의 천장
## 1부: 고요함
14평 반. 그것이 민준의 세계의 크기였다.
침대는 방의 왼쪽 모서리에 있었고, 책상은 창문 옆에 놓여 있었다. 냉장고는 주방 공간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고, 창문은 남쪽을 향해 있어서 오후 3시 이후로는 햇빛이 쏟아져 들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다른 방은 없었다. 욕실은 공용이었고, 거실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침대에서 일어나면 바로 책상이고, 책상에서 일어나면 바로 냉장고였다. 민준의 생활은 이 좁은 직사각형 안에서 반복되었다.
그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오후 3시 15분. 햇빛이 창문을 통해 들어와 그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눈을 감으면 빨간색이 보였다. 그것은 마치 혈관이 터지는 것 같은, 뭔가 깨어지는 것 같은 색깔이었다.
천장을 바라봤다.
백색이었다. 정확히는 크림색에 가까운 백색이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조금씩 누렇게 변했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것을 백색이라고 부를 수 있었다.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았다. 균열도 없었다. 곰팡이도 없었다. 그저 평탄한 면이 있을 뿐이었다. 민준은 그 천장을 이미 수백 번 바라봤다. 혹은 수천 번. 정확한 횟수는 중요하지 않았다.
*한 달? 두 달?*
준호의 목소리가 귀에 맴돌았다. 그것은 어제 전화로 들었던 목소리였다. 아니, 사흘 전이었나? 시간의 감각이 흐릿해졌다. 일을 그만두고 나서부터는 하루하루가 마치 같은 날의 반복처럼 느껴졌다.
*“기회를 잡아야 해. 정말 큰 기회를.”*
준호는 그렇게 말했다. 목소리에는 흥분이 섞여 있었다. 아니, 흥분이 아니라 절박함이었을 수도 있었다. 민준은 준호의 목소리를 정확히 분석할 능력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감정을 읽는 능력이 둔해졌다. 4년 동안 연기를 하면서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읽는 법을 배웠는데, 지금은 그것도 사라져 버렸다.
*“한 달, 두 달이면 결과가 나올 거야. 더스타에서 큰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거든.”*
준호는 계속했다. 그의 친구는 이제 유명한 배우였다. 정확히는 준배우였다. 영화에 단역으로 나온 적이 있고, 드라마에 조연으로 나온 적도 있었다. 하지만 아직 주연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미 다른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민준은 여전히 이쪽에 남아 있었다. 그 경계선 위에서, 결코 건너갈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그 선 위에서.
민준은 휴대폰을 들었다. 화면은 어두웠다. 배터리는 76퍼센트. 그는 화면을 켰다. 인스타그램이 자동으로 실행되었다. 최근 몇 달 동안 그가 자주 들어가던 앱이었다.
자신의 계정을 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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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배우
생년월일은 굳이 적지 않았다. 1993년생이라는 것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이미 31살이었다. 배우로서는 결정적인 나이였다. 늦지 않았다고 자신에게 말했지만, 시간은 계속 흘러가고 있었다. 모래시계의 모래처럼, 위에서 아래로, 끝이 없이.
대부분의 게시물은 공연 사진이었다. 소극장에서의 연극, 영상미디어센터에서의 영화제, 카페에서의 릴스 촬영. 팔로워의 대부분은 친구들이거나 회사 동료들이었다. 혹은 과거의 동문들. 그들 중 누구도 실제로 그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연예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단지 “그들의 친구”였다. “저 친구도 배우래”라는 정도의 관심.
그는 검색창을 눌렀다. 손가락이 글자를 입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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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배우 | 영화배우 | 드라마배우 | 뮤지컬배우 (가끔)
최근 게시물을 스크롤했다. 영화제 레드카펫 사진. 준호는 검은 정장을 입고 있었다. 잘 어울렸다. 옷은 분명히 비싼 것이었다. 민준은 준호가 입는 옷이 어떤 브랜드인지 알았다. 준호는 항상 그런 것들을 자랑했다. 아니, 자랑이라기보다는 자연스럽게 드러냈다. 그것이 더 상처를 줬다.
하지만 눈은 피곤해 보였다.
민준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준호의 눈은 카메라를 정확히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 눈은 뭔가를 찾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혹은… 뭔가를 잃어버린 것처럼. 마치 자신이 원래 가지고 있던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을 때, 그것이 더 이상 손에 남아 있지 않음을 깨닫는 그런 표정. 그것은 미묘한 표정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아채지 못할 것이었다. 하지만 민준은 배우였다. 그는 얼굴의 근육 하나하나를 읽는 법을 배웠다.
준호도 힘들어하고 있구나.
그 생각이 들자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그것은 좋지 않은 감정이었다. 친구의 고통을 보고 안도감을 느끼다니. 민준은 자신을 혐오했다.
휴대폰을 내려놨다.
천장을 다시 바라봤다.
여전히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았다. 백색의 천장은 침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침묵이 가장 정직한 것 같았다. 이 세상에서 거짓말하지 않는 유일한 것은 침묵이었다. 말을 하는 순간, 모든 것이 거짓이 되었다. “내가 잘할 거야.” “곧 성공할 거야.” “이번이 기회야.” 모든 말은 거짓이었다.
하지만 침묵은 달랐다.
침묵은 그저 있을 뿐이었다.
그의 심장이 뛰고 있었다. 느릿하게, 하지만 계속해서. 맥박은 정상이었다. 호흡도 정상이었다. 그는 죽어 있지 않았다. 살아 있었다. 그것이 가장 불행한 부분이었다.
외부에서 소음이 들렸다. 옆방의 누군가가 음악을 틀고 있었다. K-POP. 여자 아이돌 그룹의 목소리가 얇게 들렸다. 그들은 행복해 보였다. 가사를 제대로 들을 수는 없었지만, 멜로디는 밝았다. 밝고, 희망적이고, 절대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는 그런 목소리. 민준은 그 음악을 들으면서 자신이 그런 나이를 지나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이돌 팬들이 거느리는 나이는 이미 멀리 있었다.
음악이 갑자기 꺼졌다. 다시 침묵이 돌아왔다.
그리고 내일이 올 것이었다.
내일. 그 단어가 가슴에 걸렸다. 오전 10시. 더스타 빌딩. 이수진 대표. 그리고 준호가 말했던 “큰 기회”.
민준은 준호에게 물었었다. “뭐 하는 거야? 왜 갑자기?”
준호는 웃었다. “넌 이제 연기를 다시 해야 해. 정말 진심으로 말하는데. 넌 재능이 있어. 난 안 봤지만, 다른 사람들이 봤어. 더스타의 이수진 대표가 너한테 관심 있대. 내가 너를 소개했거든.”
소개했다.
그 단어가 마음에 걸렸다. 준호는 자신을 누군가에게 소개했다. 마치 물건을 파는 것처럼. 민준은 그것을 감사해야 할까, 아니면 모욕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시간이 지나면서 그 감정들이 섞여 버렸다.
*혹은 끝날 것이었다.*
내일이 모든 것의 끝일 수도 있었다. 이수진 대표가 자신을 보고 실망할 수도 있었다. “아, 이 정도?” 그런 표정으로. 민준은 그런 표정을 많이 봤다. 소극장에서, 영상미디어센터에서, 심지어 친구들의 얼굴에서도.
하지만 그 불확실성 속에서, 그의 심장은 여전히 뛰고 있었다. 살아 있다는 증거처럼. 끝나지 않았다는 증거처럼.
마치 배우처럼, 그는 내일의 무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 2부: 아침
민준은 5시에 깼다.
밤이 아직 완전히 가지 않았을 때였다. 새벽 5시. 햇빛도 없고, 어둠도 완전하지 않은 그 애매한 시간대. 창문 너머로 서울의 야경이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가로등들이 하나둘 꺼지고 있었다. 마치 세상이 잠들려는 것처럼.
민준은 침대 위에서 눈을 떴다. 천장을 본 것이 아니라, 옆을 봤다. 벽이 보였다. 회색의 벽. 그 벽에는 습기가 배어 있었다. 곰팡이가 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다.
그는 일어났다. 침대에서 나와 욕실로 향했다. 복도를 지나가면서 다른 방들의 문을 봤다. 각각의 문은 닫혀 있었다. 그 뒤에는 다른 사람들의 작은 세계가 있었다. 혹은 아무도 없을 수도 있었다. 민준은 이 건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
욕실에 들어갔다. 형광등이 흐릿하게 켜졌다. 거울이 벽에 붙어 있었다. 오래된 거울이었다. 표면에는 작은 얼룩들이 있었다. 물때인지 곰팡이인지 확실하지 않았다.
민준은 거울을 봤다.
자신의 얼굴이 있었다. 평범한 얼굴. 특별히 잘생기지도 않았고, 못생기지도 않았다. 그냥 평범했다. 눈은 동그란 편이었다. 코는 중간 크기였다. 입은… 음, 입은 그냥 입이었다. 배우로서는 특별한 특징이 없는 얼굴이었다. 그것이 문제였다. 특징이 없으면 기억되지 않는다. 기억되지 않으면 역할을 받지 못한다. 역할을 받지 못하면… 배우가 아니다.
하지만 눈 아래에는 뭔가가 생겨 있었다.
가벼운 다크서클이었다. 불면의 밤의 증거. 민준은 어제 밤을 거의 자지 못했다. 눈을 감으면 자꾸만 생각이 떠올랐다. 내일. 더스타. 이수진 대표. 준호.
그는 얼굴을 찬물로 씻었다. 찬물이 피부에 와닿을 때, 신경이 깨어났다. 마치 물이 그를 생명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처럼. 수건으로 닦았다. 수건은 거칠었다. 숨을 몇 번 쉬었다.
돌아와 옷을 입었다.
검은 티셔츠. 회색 바지. 낡은 운동화. 준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편한 복장으로 와. 격식 차릴 필요 없어. 그냥 너 자신으로.”*
“너 자신으로.” 그 말이 가장 어려웠다. 민준은 자신이 누구인지 몰랐다. 배우? 하지만 배우가 하는 일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럼 무직자? 하지만 그렇게 부르고 싶지는 않았다. 회사원? 이미 그만뒀다. 그럼 뭐였을까?
거울 앞에 다시 섰다. 검은 티셔츠와 회색 바지를 입은 자신을 봤다. 마치 영화의 단역처럼 보였다. 이름 없는 직장인, 혹은 이름 없는 거리의 행인. 그게 자신의 위치였다.
아침 식사를 했다. 냉장고에는 별로 없었다. 계란 두 개, 치즈, 식빵. 그는 계란을 구웠다. 토스트를 만들었다. 치즈를 올렸다. 기계적으로. 마치 그것이 일이었던 것처럼.
먹으면서 창문을 봤다.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서쪽 하늘이 조금씩 밝아지고 있었다. 아니, 동쪽이었다. 민준은 방향 감각을 잃어버렸다. 이 방에 살면서도 어느 방향이 어느 방향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시간을 확인했다. 6시 45분.
너무 이르다. 약속은 오전 10시. 아직 3시간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민준은 이미 떨리고 있었다. 손가락이 떨렸다. 심장이 빨라졌다. 마치 이미 무대에 서 있는 것처럼.
샤워를 다시 했다. 따뜻한 물이 몸을 적셨다. 비누를 사용했다. 향기는 중립적이었다. 특별히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그런 향기. 머리를 감았다. 손가락으로 두피를 마사지했다. 마치 자신을 달래는 것처럼.
나와 드라이했다. 다시 같은 옷을 입었다. 검은 티셔츠, 회색 바지, 낡은 운동화.
거울을 봤다. 여전히 평범했다.
시간을 다시 확인했다. 7시 30분. 아직 2시간 30분.
민준은 침대에 누웠다. 천장을 봤다. 아직도 백색이었다. 여전히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았다.
## 3부: 강남
오전 9시 40분. 민준은 더스타 빌딩 앞에 서 있었다.
강남역 3번 출구에서 나와 10분을 걸어왔다. 빌딩들이 높았다. 마치 자신의 꿈을 압도하려는 듯. 하늘을 가리는 것처럼. 민준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지만, 하늘은 보이지 않았다. 하늘은 이미 빌딩들에 의해 분할되고 조각나 있었다.
더스타 빌딩은 회색이었다. 강화 유리로 만들어진 것처럼 보이는 벽. 차갑고, 반사되는 표면. 민준은 그 벽에 자신의 모습이 비치는 것을 봤다. 검은 티셔츠를 입은 작은 인물. 마치 곤충처럼 보였다.
로비에 들어갔다. 에어컨의 냉기가 얼굴에 닿았다. 로비는 넓었다. 하얀 타일로 깔려 있었고, 천장은 높았다. 사람들이 바쁜 걸음으로 지나갔다. 모두 목표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민준은 그들을 따라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숫자를 읽었다. 15층. 그것은 이수진 대표의 사무실이 있는 층이었다. 준호가 말했다. “15층. 가면 알아.”
엘리베이터를 눌렀다. 금속 문이 열렸다. 안은 비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