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물의 굽이에서 – 제181화: 손가락 끝의 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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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81화: 손가락 끝의 온도

강변 둑길에서 돌아온 은서는 할머니 댁의 마루에 앉아 있었다. 햇빛이 창을 통해 들어와 마루 위에 긴 그림자를 만들었고, 그 그림자 속에서 은서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며 손등에 남아있는 민준이의 손가락의 흔적을 느꼈다. 민준이의 손가락이 닿았던 자리가 아직도 따뜻했지만, 그 온기가 점점 사라지는 걸 알면서도 자신이 그걸 잊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사람은 이렇게 오랫동안 체온을 간직할 수 있을까.

부엌에서 할머니가 뭔가를 끓이고 있었다. 된장국의 향기가 마루까지 밀려와 은서의 코를 자극했다. 은서는 코로 숨을 쉬며 그 냄새를 따라 부엌으로 향했다. 냄새는 감정보다 빨랐다. 그것은 기억을 속일 수 없었다. 할머니가 끓이는 국은 항상 같은 냄새였고, 은서는 그 냄새 속에서 자신이 얼마나 오래 여기 있었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은서야, 밥 먹어라.” 할머니의 목소리가 부엌에서 나왔다.

은서는 일어나 부엌으로 들어가서 할머니의 손이 예전보다 더 투명해 보이는 것을 보았다. 피부 아래로 핏줄이 보이고, 주근깨처럼 보이는 갈색 얼룩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은서는 그런 할머니의 손을 보면서 처음으로 할머니가 늙어가고 있다는 걸 직시했다.

은서는 밥상에 앉았다. 국은 따뜻했고, 된장의 짙은 맛이 혀를 감쌌다. 은서는 천천히 수저를 들었다. 밥을 떠서 국에 담그고, 입에 넣고, 삼켰다. 이 모든 동작이 너무 의식적이어서 이상했다. 보통은 의식하지 않고 하는 일인데, 지금은 자신이 밥을 먹는 모습을 바깥에서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너 뭐 생각해?” 할머니가 물었다.

은서는 수저를 놓았다. “그냥… 봄이 빨리 온 것 같아요.”

“봄?” 할머니가 웃음을 터뜨렸다. “봄은 매해 같은 시간에 오지. 너만 늦었던 거야.”

은서는 할머니의 말이 무슨 뜻인지 생각해봤다. 맞다. 봄은 항상 3월 말쯤 오는 거였다. 하천리의 봄도 다른 곳의 봄도 다를 바 없었다. 다만 은서가 서울에 있을 때는 봄을 놓쳤던 거고, 지금 여기서 봄을 만나고 있는 거였다.

“민준이는?” 할머니가 밥을 먹으며 물었다.

“공방에 있을 거 같아요.”

“그 총각, 자기 일에 집중하는 거 좋아. 그런데 사람을 잘 챙기지 않더라고.” 할머니가 말했다. “너는?”

“저는요?”

“너는 자기를 챙기냐고.”

은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은서의 침묵을 읽으며 국을 한 숟가록 더 떠먹었다.

“사람은 혼자 챙길 수 없어. 누군가 챙겨줘야 하고, 누군가를 챙겨줘야 해. 그게 사는 거지.” 할머니가 말했다.

은서는 할머니의 말을 들으며 자신의手を 다시 봤다. 민준이의 손가락이 닿았던 자리. 그 자리가 누군가를 챙겨주는 손인지, 챙겨받는 손인지 구분이 안 갔다. 아마 둘 다였을 것 같았다.

은서는 마루에 나와서 천장을 바라봤다. 천장의 목재는 오랜 세월 동안 햇빛에 그을려 검게 변해 있었다. 그 검음은 아름다웠다. 왜냐하면 그건 시간의 흔적이었기 때문이다.

민준이의 손가락도 그런 거겠지. 도자기를 만들면서 생긴 굳은살, 흙의 자국, 햇빛에 그을린 피부. 그 모든 게 시간의 흔적이고, 그게 아름답다.

은서는 갑자기 민준이를 보고 싶었다. 공방에 가서 그의 손을 보면 어떨까. 그의 손이 다시 자신의 손을 스칠 때, 그 온기를 느끼고 싶었다.

“할머니, 나 나가볼게요.” 은서가 부엌을 향해 외쳤다.

“가거라. 저녁은 일찍 와.”

은서는 신발을 신고 나갔다. 하천리의 오후는 고요했다. 새들의 울음소리만 들렸고, 바람은 거의 없었다. 은서는 민준이의 공방으로 향하는 길을 걸었다. 그 길은 이제 낯설지 않았다. 3개월 전만 해도 이 길을 가는 게 어색했는데, 지금은 발이 알아서 가는 길이 되어 있었다.

공방에 도착했을 때, 은서는 문을 열기 전에 잠깐 멈췄다. 창문을 통해 안을 봤다. 민준이는 도자기 바퀴 앞에 앉아 있었다. 그의 손은 흙을 빚고 있었고, 그의 얼굴은 집중에 빠져 있었다. 은서는 그 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바라보고 싶었다.

창문 너머로 본 민준이는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흙먼지가 햇빛에 떠다니고, 그 사이로 민준이의 실루엣이 보였다. 그는 완전히 다른 세상에 있는 것 같았다. 말이 필요 없는 세상. 손과 흙만 있으면 되는 세상.

은서는 천천히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 공방의 냄새가 밀려 나왔다. 흙의 냄새, 물의 냄새, 그리고 구워진 도자기의 냄새. 그것들이 섞여서 만드는 향기는 하천리 어디에서도 맡을 수 없는 냄새였다.

민준이는 은서의 발걸음 소리를 들었는지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에는 집중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눈동자가 아직 도자기 바퀴에 가 있었다.

“왔어?” 민준이가 물었다.

“네. 산책하다가…” 은서는 민준이의 손가락이 닿았던 자리를 생각했다.

“산책?” 민준이가 웃음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여긴 산책 경로가 아니잖아.”

은서는 얼굴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그냥 이쪽이 좋아서요.”

민준이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대신 손을 물로 헹굼질했다. 흙이 물에 풀려 흘렀다. 그의 손가락 사이를 흙이 떠내려갔다. 은서는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이 손이 도자기를 만들고, 이 손이 자신의 손을 만졌다.

“뭐 봐?” 민준이가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은서는 민준이의 손을 바라봤다. 그의 손은 거칠었고, 흙의 자국이 남아 있었다.

“손?” 민준이가 자신의 손을 들어 보였다. “더러워. 계속 흙을 만지니까.”

“더럽지 않아요.” 은서는 민준이의 손을 바라봤다. 그의 손은 그녀에게 아름다웠다. 그 손이 도자기를 만들고, 그 손이 자신의 손을 만졌다. 그 모든 건 시간의 흔적이고, 그게 아름답다.

“저는요?”

“너는 자기를 챙기냐고.”

은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은서의 침묵을 읽으며 국을 한 숟가락 더 떠먹었다.

“사람은 혼자 챙길 수 없어. 누군가 챙겨줘야 하고, 누군가를 챙겨줘야 해. 그게 사는 거지.” 할머니가 말했다.

은서는 할머니의 말을 들으며 자신의 손을 다시 봤다. 민준이의 손가락이 닿았던 자리. 그 자리가 누군가를 챙겨주는 손인지, 챙겨받는 손인지 구분이 안 갔다. 아마 둘 다였을 것 같았다.

밥을 먹은 후 은서는 다시 마루에 나갔다. 오후의 햇빛은 더 강해졌고, 마루 위의 그림자는 더 짧아졌다. 은서는 마루에 누워서 천장을 바라봤다. 천장의 목재는 오랜 세월 동안 햇빛에 그을려 검게 변해 있었다. 그 검음은 아름다웠다. 왜냐하면 그건 시간의 흔적이었기 때문이다.

민준이의 손가락도 그런 거겠지. 도자기를 만들면서 생긴 굳은살, 흙의 자국, 햇빛에 그을린 피부. 그 모든 게 시간의 흔적이고, 그게 아름답다.

은서는 일어나 앉았다. 갑자기 민준이를 보고 싶었다. 공방에 가서 그의 손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 손이 다시 자신의 손을 스칠 때, 그 온기를 느끼고 싶었다.

“할머니, 나 나가볼게요.” 은서가 부엌을 향해 외쳤다.

“가거라. 저녁은 일찍 와.”

은서는 신발을 신고 나갔다. 하천리의 오후는 고요했다. 새들의 울음소리만 들렸고, 바람은 거의 없었다. 은서는 민준이의 공방으로 향하는 길을 걸었다. 그 길은 이제 낯설지 않았다. 3개월 전만 해도 이 길을 가는 게 어색했는데, 지금은 발이 알아서 가는 길이 되어 있었다.

공방에 도착했을 때, 은서는 문을 열기 전에 잠깐 멈췄다. 창문을 통해 안을 봤다. 민준이는 도자기 바퀴 앞에 앉아 있었다. 그의 손은 흙을 빚고 있었고, 그의 얼굴은 집중에 빠져 있었다. 은서는 그 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바라보고 싶었다.

창문 너머로 본 민준이는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흙먼지가 햇빛에 떠다니고, 그 사이로 민준이의 실루엣이 보였다. 그는 완전히 다른 세상에 있는 것 같았다. 말이 필요 없는 세상. 손과 흙만 있으면 되는 세상.

은서는 천천히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 공방의 냄새가 밀려 나왔다. 흙의 냄새, 물의 냄새, 그리고 구워진 도자기의 냄새. 그것들이 섞여서 만드는 향기는 하천리 어디에서도 맡을 수 없는 냄새였다.

민준이는 은서의 발걸음 소리를 들었는지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에는 집중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눈동자가 아직 도자기 바퀴에 가 있었다.

“왔어?” 민준이가 물었다.

“네. 산책하다가…”

“산책?” 민준이가 웃음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여긴 산책 경로가 아니잖아.”

은서는 얼굴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그냥 이쪽이 좋아서요.”

민준이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대신 손을 물로 헹굼질했다. 흙이 물에 풀려 흘렀다. 그의 손가락 사이를 흙이 떠내려갔다. 은서는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이 손이 도자기를 만들고, 이 손이 자신의 손을 만졌다.

“뭐 봐?” 민준이가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손?” 민준이가 자신의 손을 들어 보였다. “더러워. 계속 흙을 만지니까.”

“더럽지 않아요.”

민준이는 은서를 바라봤다. 그의 눈이 은서의 눈과 만났다. 그 순간 공방 안의 공기가 변했다. 아니면 은서의 감각이 예민해진 거였다.

“손 봐도 돼?” 민준이가 물었다.

은서는 손을 내밀었다. 민준이는 은서의 손을 조심스레 들었다. 그의 손은 따뜻했고, 손가락은 거칠었다. 그는 은서의 손등을 살펴보듯 바라봤다. 마치 도자기를 검사하듯이.

“깨끗해.” 민준이가 말했다. “너는 손을 잘 챙기네.”

“손을 챙긴다는 게 무슨 말이에요?”

“흙이 안 묻으니까.” 민준이가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손을 못 챙겨. 이렇게 자꾸 더러워진다.”

은서는 민준이의 손을 더 자세히 봤다. 확실히 흙의 자국이 남아 있었다. 손톱 밑에도 검은 흙이 있었고, 손가락 관절 주변도 거칠어 있었다. 하지만 은서는 이 손이 더러워 보이지 않았다. 이 손은 뭔가를 만드는 손이었다. 그 자국들은 노고의 흔적이었다.

“깨끗해.” 은서가 다시 말했다.

민준이는 은서의 손을 놓지 않았다. 두 손이 계속 맞닿아 있었다. 은서의 손과 민준이의 손. 깨끗한 손과 더러운 손. 하지만 이제 그 경계는 없었다. 두 손이 만나면서 그 경계는 무너졌다.

“오늘 뭐 했어?” 민준이가 물었다.

“할머니랑 밥 먹고… 마루에서 누워 있었어요.”

“뭐 생각했어?”

은서는 그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잠깐 생각했다. 뭘 생각했나? 민준이의 손을 생각했다. 할머니의 늙어가는 손을 생각했다. 시간의 흔적을 생각했다. 자신이 이 마을에 얼마나 오래 있을 건지를 생각했다.

“그냥… 여기가 낯설지 않아졌다는 거요.”

민준이는 은서의 말을 들으며 웃음을 지었다. “낯설지 않아?”

“처음에는 모든 게 낯설었는데… 이제는 여기가 자연스러워요. 할머니 집도, 이 마을도, 당신도.”

은서는 마지막 말을 하면서 자신의 손을 조금 더 민준이 손에 가깝게 밀어붙였다.

민준이는 은서의 손을 들어 자신의 뺨에 댔다. 그의 뺨은 따뜻했다. 은서는 그 온기를 느꼈다. 그리고 그 온기가 자신의 손으로 전해져 오는 걸 느꼈다. 이제 온기의 방향이 역전되었다. 아니면 처음부터 양방향이었던 걸까.

“너 때문에 손이 더 더러워질 것 같아.” 민준이가 말했다.

“왜요?”

“흙을 더 오래 만지니까. 손이 흙에서 떨어지고 싶지 않아.”

은서는 그 말을 이해했다. 손이 흙에서 떨어지고 싶지 않다는 건, 뭔가를 놓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그럼 계속 만져요.”

민준이는 은서의 손을 놓았다. 대신 그녀의 머리를 쓸어올렸다. 손가락이 은서의 이마를 지나갔고, 그 감촉은 마치 확인하는 것 같았다. 내가 여기 있다는 걸. 너도 여기 있다는 걸.

“너 머리에 흙이 묻었어.”

“정말요?” 은서가 자신의 머리를 만져봤다.

“내가 묻혔다. 미안해.”

“괜찮아요.”

은서는 자신의 머리에 묻은 흙을 떨어내지 않기로 했다. 그건 민준이의 손가락이 닿았다는 증거였다. 마치 낙인처럼.

그들은 공방에서 오래 있었다. 민준이는 다시 도자기 바퀴에 앉았고, 은서는 그의 옆에 앉아 그의 손이 움직이는 것을 봤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형태의 도자기가 천천히 만들어지고 있었다. 대칭이 아니었다. 한쪽은 넓고 한쪽은 좁았다. 완벽하지 않았다.

“이건 뭐예요?” 은서가 물었다.

“모르겠어. 아직.”

“완성되면 뭐가 될까요?”

“손가락이 알게 될 거야.”

은서는 그 말을 들으며 자신의 손을 봤다. 손가락이 안다는 게 무슨 뜻일까. 아마 그건 계획 없이 만드는 거라는 뜻이었다. 마치 은서가 서울을 떠나올 때처럼. 계획 없이. 단지 손가락이 하는 대로.

해가 기울어가고 있었다. 공방의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이 옅어지고 있었다. 은서는 일어나야 한다는 걸 알았다. 할머니가 저녁은 일찍 오라고 했다.

“가야 해요.”

민준이는 손을 멈추고 은서를 봤다. “다음엔 언제 와?”

“내일요?”

“내일.”

은서는 공방을 나갔다. 뒤돌아 보니 민준이는 이미 다시 도자기 바퀴에 집중하고 있었다. 은서는 그걸 보며 생각했다. 이 사람은 자신을 잊을 거야. 손이 흙에 집중하면 다른 모든 게 사라질 거야. 하지만 그것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건 진심이었기 때문이다. 뭔가를 정말로 사랑할 때의 집중력. 그리고 은서는 자신도 그런 집중의 대상이기를 원했다.

하천리로 가는 길에 은서는 자신의 머리를 다시 만져봤다. 민준이가 묻혀 놓은 흙이 아직도 있었다. 그녀는 그걸 떨어내지 않았다. 그 흙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그리고 그때쯤이면 자신이 어떻게 변해 있을지 궁금했다.

할머니 댁에 도착했을 때 해는 이미 반은 떨어져 있었다. 마루에는 저녁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은서는 신발을 벗고 마루에 올라섰다. 할머니는 부엌에서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었다.

“왔냐. 밥 먹어라.”

은서는 밥상에 앉았다. 된장국, 계란말이, 나물. 매일 같은 밥상이었다. 하지만 은서는 이제 그 반복이 좋았다. 왜냐하면 그 반복 속에서 자신이 살아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민준이는?” 할머니가 물었다.

“공방에 있어요.”

“그 총각, 진짜 도자기 사랑하네. 다른 건 모르고.”

“다른 것도 알아요.” 은서가 말했다.

할머니는 은서를 바라봤다. 그리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 그래. 너 말이 맞지.”

은서는 밥을 먹으며 자신의 머리에 아직도 묻어 있는 흙을 생각했다. 그 흙은 민준이의 손가락이 닿았던 증거였다. 그리고 그건 충분했다. 시간이 지나 그 흙이 사라져도, 그 감촉은 남을 거였다.

밤이 깊어갔다. 은서는 마루에 누워 천장을 봤다. 천장의 검은 목재는 시간을 담고 있었다. 그리고 은서도 이제 시간을 담고 있었다. 하천리에서 보낸 시간들. 민준이와 함께한 시간들. 그 모든 시간이 은서의 손가락 끝에 묻어 있었다.

“모르겠어. 아직.”

은서는 민준이의 물음에 고개를 흔들었다. 아직 어떤 작품을 만들지 정해진 바가 없었다. 단지 손가락이 움직이는 대로 작품이 완성될 뿐이다.

“완성되면 뭐가 될까요?”

민준이는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항상 차분하고 조용했다. 은서는 그의 목소리에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눈은 항상 작품에 집중되어 있었다.

“손가락이 알게 될 거야.”

은서는 그의 말을 듣고 자신의 손을 봤다. 손가락이 알게 된다니, 어떤 뜻일까? 아마도 그건 계획 없이 만드는 거라는 뜻이었다. 마치 은서가 서울을 떠나올 때처럼, 계획 없이. 단지 손가락이 하는 대로.

은서는 자신의 손가락을 다시 봤다. 손가락 끝에는 아직도 흙이 묻어 있었다. 민준이의 손가락이 닿았던 곳이었다. 그 감촉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은서는 그 감촉을 생각하며 미소 지었다.

해가 기울어가고 있었다. 공방의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이 옅어지고 있었다. 은서는 일어나야 한다는 걸 알았다. 할머니가 저녁은 일찐 오라고 했다.

“가야 해요.”

민준이는 손을 멈추고 은서를 봤다. “다음엔 언제 와?”

“내일요?”

“내일.”

은서는 공방을 나갔다. 뒤돌아 보니 민준이는 이미 다시 도자기 바퀴에 집중하고 있었다. 은서는 그걸 보며 생각했다. 이 사람은 자신을 잊을 거야. 손이 흙에 집중하면 다른 모든 게 사라질 거야. 하지만 그것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건 진심이었기 때문이다. 뭔가를 정말로 사랑할 때의 집중력. 그리고 은서는 자신도 그런 집중의 대상이기를 원했다.

하천리로 가는 길에 은서는 자신의 머리를 다시 만져봤다. 민준이가 묻혀 놓은 흙이 아직도 있었다. 그녀는 그 흙을 떨어내지 않았다. 그 흙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그리고 그 때쯤이면 자신이 어떻게 변해 있을지 궁금했다.

은서는 하천리 마을을 지나갔다. 마을에는 이미 해가 진 후였다. 거里的 가로등이 روشن했다. 은서는 그 밝은 빛을 받으며 걸었다. 마을에서 사람이 몇 명 지나가던 중이었다. 은서는 그들을 인사했다. 하지만 그들은 은서를 알아보지 못했다. 은서는 그들을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오직 민준이 생각했다.

할머니 댁에 도착했을 때 해는 이미 반은 떨어져 있었다. 마루에는 저녁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은서는 신발을 벗고 마루에 올라섰다. 할머니는 부엌에서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었다.

“왔냐. 밥 먹어라.”

은서는 밥상에 앉았다. 된장국, 계란말이, 나물. 매일 같은 밥상이었다. 하지만 은서는 이제 그 반복이 좋았다. 왜냐하면 그 반복 속에서 자신이 살아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민준이는?”

할머니가 물었다.

“공방에 있어요.”

“그 총각, 진짜 도자기 사랑하네. 다른 건 모르고.”

“다른 것도 알아요.” 은서가 말했다.

할머니는 은서를 바라봤다. 그리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 그래. 너 말이 맞지.”

은서는 밥을 먹으며 자신의 머리에 아직도 묻어 있는 흙을 생각했다. 그 흙은 민준이의 손가락이 닿았던 증거였다. 그리고 그건 충분했다. 시간이 지나 그 흙이 사라져도, 그 감촉은 남을 거였다.

밤이 깊어갔다. 은서는 마루에 누워 천장을 봤다. 천장의 검은 목재는 시간을 담고 있었다. 그리고 은서도 이제 시간을 담고 있었다. 하천리에서 보낸 시간들. 민준이와 함께한 시간들. 그 모든 시간이 은서의 손가락 끝에 묻어 있었다.

은서는 눈을 감았다. 하지만 그녀는 잠이 오지 않았다. 민준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의 손가락이 흙에 닿을 때의 모습. 그의 눈이 작품에 집중되어 있을 때의 모습. 은서는 그의 모습을 다시 보고 싶었다. 그녀는 민준이를 다시 만나고 싶었다.

은서는 눈을 떴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민준이를 사랑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자신이 사랑할 수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알았다. 그녀는 민준이를 사랑했고, 그녀는 자신이 민준이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원했다.

은서는 침대에 누워 몸을 웅크렸다. 그녀는 민준이의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손가락이 자신의 흙을 만지는 감촉을 다시 한번 느꼈다. 그녀는 그 감촉이 영원히 남아 있기를 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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